나혜석, 가자! 파리로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나혜석
가자! 파리로.
살러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련다.
찾을 것도, 만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돌아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 공(空)인 나는 미래로 가자.
사남매 아해들아!
애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잘못된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애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애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I die away from home, while fighting against loneliness
by Na, Hye-seok
I’ll go! To Paris.
Not to live but to die.
It was Paris that killed me.
It was in Paris that I was made a real woman.
I will die in Paris.
Nothing to look for, to meet, to gain.
But no reason to come back. I’ll go forever.
As a nothing in the past and the present, I’ll go to the future.
My four sons and daughters!
Don’t blame me but blame the social system, wrong morals, laws and customs.
Your mother, a pioneer in this transitional age, was a victim of the line of Fate.
Later, if you become a diplomat and come to Paris
Find your mother’s grave and put a flower unto it.
(Translated by Choi)
나혜석(1896-1948)은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한국의 여류 시인이자 화가입니다.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의 식민통치를 고스란히 살아왔고, 해방은 보았으나 그는 몸도 마음도 모두 상해버린 무연고의 시신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부남과의 불같은 사랑, 연인의 죽음, 결혼, 그리고 불륜으로 지탄받은 또 한 번의 사랑과 이혼. 그녀의 삶은 유교의 남존여비 사상으로 경직된 20세기 전반 한국사회에서 신여성으로, 페미니스트로, 화가이자 시인으로서의 한 여인을 얘기하기에는 너무도 연극적입니다. 한국 여성 가운데 최초로 유럽을 두루 방문했던 사람, 부잣집 다섯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나 동경에서 미술을 공부했던 여성, 나혜석은 당시의 여성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삶의 궤적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 직접적이고 산문 같은 시에서 그녀는 자신의 젊음을 가장 자유롭게 불사를 수 있었던 그곳, 파리를 그리워합니다. 그곳으로 가, 그곳에서 죽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곳에서의 사랑으로 여인이 되었지만 그 위험한 사랑으로 몰락한 나혜석. 그녀는 서양문학 상의 그 어떤 여성 작가들보다도 자유를 추구했던, 남성 중심의 세상을 향한 놀라운 저항의 외침을 남긴 여성운동가이기도 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의 ‘파리’가 있기 마련이죠. 그녀의 파리는 그 어느 것도 찾을 수 없는 쓸쓸하고 외로운 곳이었지만 또한 그곳 외에는 돌아갈 곳 없는 유일한 자신의 세계였던 모양입니다. 요양원에서 세상을 버리며, 연고 없는 시신으로 식어갈 때 그녀의 예술혼 역시 끝없는 자유와 회한 속에 사라져 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한 시대의 억압과 비난, 갈망과 투쟁의 예술로 남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