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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Dec 29. 2020

사슴과 밤호수

노천명과 모윤숙, 두 여인의 슬픈 은유

사슴

        노천명(1911~1957)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Deer

       by Roh, Cheon-myong     


A sad animal with such a long neck,

You are so reticent that you always look gentle.

With a fragrant crown,

You may have a species of noble ancestry.    


Looking at her shadow in the water,

Thinking out the lost legend,

Out of irresistible nostalgia,

She cranes her sad neck to look on the mountain far away.                



밤호수

           모윤숙(1910~1990)    


호수 밑 그윽한 곳

품은 꿈 알 길 없고

그 안에 지나는 세월의

움직임도 내 알 길 없네    


오직 먼 세계에서 떠 온 밤 별 하나

그 안에 안겨 흔들림 없노니

바람 지나고

티끌 모여도

호수 밑 비밀 모르리    


아무도 못 듣는 그곳

눈물 어린 가슴 속 같이

호수는 별 하나 안은 채 조용하다.    


The Night Lake

           by Mo, Yoon-sook     


At the deep and secret bottom of the lake

I never know what dream I have

And how the passing years move

Through the lake.     


Only a night star rising from the distant world

Is embraced by it and never shaken.

When the wind passes

When the dust gathers

I will never know the secret under the lake.    


The place nobody can hear,

Like in the tearful heart

The lake, embracing a star, remains silent.     


20세기 초반 척박했던 시기에 태어났던 두 여인은 똑같이 시를 사랑했지요. 노천명과 모윤숙. 두 사람은 20세기 한국의 시단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여류시인들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듣던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기린이 아니고 사슴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물원에서 보았던 사슴의 순수하고 슬픈 눈망울을 떠올렸었죠. 왕관 같이 위엄 있던 사슴의 뿔은 왜 그리 여러 집의 마루 벽에 걸려있었던지요. 어느 날 숲에서 물을 마시던 사슴을 보았습니다. 사슴은 고개를 들어 먼 산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총총히 숲 속으로 사라져갔죠. 그 슬프고 외로운 모습은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있었고, 지금 나는 무언가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으며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 몽롱한 그 기억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이 저려옵니다.     


모윤숙의 호수는 무슨 비밀을 지니고 있었을까요? 내 마음속의 꿈과 희망, 흐르는 세월조차 알 길 없는 깊은 호수가의 밤. 그리고 호수에 걸렸던 별 하나. 그 짙은 밤의 정적은 무수한 이야기와 비밀을 품고 있겠죠. 그렇게 말없이 수많은 사연들을 듣고 있었을 겁니다. 노천명과 모윤숙은 사슴과 호수를 통해 아련하고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 슬픔 속에 묻힌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먼 곳을 바라보는 사슴의 시선이 머무는 곳, 그 숲의 저편으로 마치 밤하늘처럼 고요하게 호수가 찰랑이고 있을겁니다. 그렇게 그림처럼 두 여인의 시가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슴의 숲과 별을 삼킨 호수 중간 어디쯤에서 한숨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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