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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an 06. 2021

전혜린의 마지막 편지

1965년 1월 6일, 새벽 4시

전혜린의 ‘마지막 편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에서        


장 아제베도에게    


1965년 1월 6일, 새벽 4시.  


어제 집에 오자마자 네 액자를 걸었다. 방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네 냄새. 네 글(내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갑자기 네 편지 전부(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를 벽에 붙이고 싶은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금단현상(禁斷現象-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도 좀 들어야 가슴에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Ich liebe alles an dir).    


내가 이런 옛날 투의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 좀 쑥스럽고 우스운 것도 같다. 그렇지만 조르쥬 상드(G.sand)가 뮈쎄(Musset)와 베니스에 간 나이인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나는 좀 더 불태워야 한다고 분발(?)도 해본다. 나의 지병(持病)인 페시미즘(Pessimismus)을 고쳐 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생명에의 애착을 만들어 줄 사람은 너야. 오늘 밤 이런 것을 읽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자살자의 수기 중의 일구야.    


장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 속에 있는 이 악마(Totessehnsucht)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 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 줘.        


The last letter from ‘And Never Said a Word’ (posthumous)

                               by Chun, Hye-rin    


Dear Jean Azevedo     


At 4 a.m. 6th, January, 1965    


As soon as I got home yesterday, I hung your picture. It seemed that my room was full of your smell and your letters.(I loved them before anything else.) All of a sudden, I was frantically possessed with the impulse to put all of your letters(especially those ones which I like most.) on the wall.     


Why do I like you so much? Nothing can compare to you. I would rather die than give you up. If I cannot see your lovely eyes and your cute smiles for a few hours, I cannot help suffering from withdrawal symptoms like drug addicts. Something boiling hot in my heart never cools down but I hear your voice for a while. Your righteous character, straight attitudes, manliness, cleverness, vitality, intellectual curiosity, lovely face... I love everything you have. (Ich liebe alles an dir.)    


It may be awkward and embarrassing for me to write this old-fashioned love letter. But, thinking that G. Sand and Musset left for Venice at my age, I have to encourage myself to be more passionate. Nobody but you can cure me of the chronic disease of pessimism. It is only you who can make me deeply attached to life. Tonight I read this;


‘Love? What is love? It is love that prevents a soul and a body from being dissolved into carbon, hydrogen, nitrogen, oxygen, chlorine and other elements.’ It’s a phrase from a note by a suicide.      


Jean Azevedo!    


Please help me never return to the elements! I really need your help. I want to have a burning body alive. If possible, I want to sustain my life. Sometimes, however, I feel that my life line will almost cut off. Then I go mad. I dislike and fear this devil in me. No one but you can drive the demon away from me. Please let me live.      


전혜린의 수필 유고(遺稿)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것은 1966년이었다.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듬해였다. 수필집의 제목은 전혜린이 번역했던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And Never Said a Word, 1953)에서 따왔다. 위의 글은 그 수필집에 수록된 부치지 않은 그녀의 마지막 편지였다. 장 아제베도라는 인물을 수취인으로 하여 익명의 누군가에게 쓴 이 편지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에 쓴 것이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1959년 스물다섯의 전혜린은 모교였던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해 그녀는 유학시절 만난 남편과 딸을 둔 유부녀였음에도 강의실에서 만난 스무 살의 제자와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다. 인습과 사회규범을 뛰어넘은 파격적인 감정의 분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청에 못 이긴 어린 연인이 이별을 선언할 때, 그녀는 냉소적인 미소와 함께 그를 보낸다. 이 편지의 대상이 그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그녀는 간절히 구조를 요청한다. 뜨거운 육체로 살고 싶다고, 삶을 유지하고 싶다고 도와 달라 한다. 그것은 생명과 사랑에 대한 갈구였다.     


전혜린은 어떤 마음으로 살다가 떠난 것일까? 그녀의 문학적 감성과 열정은 왜 현실의 벽 앞에서 그렇듯 무기력하게 무너졌는지. “식은 숭늉 같고 법령집 같은 나날”에서 벗어나는 꿈을 매일처럼 꾸었다는 그녀는 시대의 혼탁한 공기에 질식하고 만 것일까? 위의 편지에서 전혜린은 소녀처럼 사랑의 열정에 들뜬 모습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지식인들의 상투적인 말투와 잠시 유럽을 경험한 어설픈 이방인의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그녀는 이 편지에서 지식의 허위와 인습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순수하고 솔직한 자신의 내면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서른의 치기가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녀는 ‘나는 나를 타락시킬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던 프랑스와 사강처럼 그 시절 십 대와 이십 대를 살았던 많은 젊은이들에게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꾸게 했으니까.     


이 짧은 편지에서 그녀는 사랑만이 그녀를 원소들로 분열시키지 않는 것임을 선언한다. 그녀의 열정은 학문도 예술도 아니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뜨거운 몸으로 만끽되는 사랑뿐이었다. 너무도 외로웠을 것이다. 그녀 속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을 잠재울 방법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해 여성들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갈구의 상징이며, 발화되지 못한 예술혼의 그림자였지만 죽음으로써 시대를 함께한 수많은 젊음들의 우상이 된 여인이었다. 19세기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 조르주 상드처럼 자유분방한 사랑을 원하였지만 또한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 대한 허무한 반항아이기도 하였다. 전혜린, 그녀는 시인 나혜석과 더불어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녀의 짧은 편지를 영어로 옮긴 것은 그 어떤 시보다 광활하게 여류 시인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서른 살의 젊은 그녀를 종로 거리의 어느 찻집에서 만난다면 나 역시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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