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예술은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

by 최용훈

“나는 대상을 본 대로 그리지 않는다. 생각하는 대로 그린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 게르니카(Guernica)를 그렸고 큐비즘(입체파, Cubism)의 창시자. 문학의 셰익스피어만큼 국적을 불문하고 귀에 익은 예술가 피카소. 그는 화가였을 뿐 아니라 조각가였고, 판화가, 도예가, 무대 디자이너이기도 하였다. 20세기 모더니즘을 대표하였고, 현대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그는 ‘피카소’라는 독립된 장르를 만들어낸 예술가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내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거야. 신부가 되면, 결국은 교황이 될 테고.’ 대신 나는 화가가 되었소. 그리고 결국 피카소가 되었지요.”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는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어머니 로페즈, 아버지 블라스코 사이에서 1881년 태어났다. 한 때 ‘무적함대’를 앞세워 유럽의 최강대국이었고 세계 전역에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했던 스페인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멕시코 독립 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하기 시작하였고,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쿠바와 필리핀을 미국에 넘겨야 했다. 국내에서도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19세기 말 스페인 제1공화국이 세워져 왕정이 폐지되었으나 곧바로 군부 쿠데타와 왕정복고가 연달아 일어나 심각한 내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인민 전선의 승리로 수립된 스페인 제2공화국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에서 패하였고, 1939년 프랑코 정권이 수립되어 이후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까지 36년간 군부 독재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조국의 정치적 혼란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20세기 초엽 유럽 예술의 메카였던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주로 그곳에서 화가로서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진지하고 조숙한 아이였다. 깊고 사색적인 눈동자는 그의 비범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학업에는 뛰어나지 못했지만 그는 어린 나이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유아기의 그는 “피즈, 피즈”라고 옹알거리곤 했는데 그것은 연필을 가리키는 스페인어 ‘라피즈’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화가의 운명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던 것이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미술교사였다. 아들의 재능은 쉽사리 눈에 띄는 것이었고, 13세 될 무렵에는 이미 아버지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소년 피카소는 학교 수업에 대해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언제나 공책에 그림을 끄적거릴 뿐이었다.


“수업 태도가 좋지 않아서 난 흰색의 벽과 벤치 하나가 놓인 작은 방으로 쫓겨나곤 했어요. 하지만 난 그곳이 좋았죠. 스케치북을 가지고 들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난 그곳에 영원히 머물면서 끊임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열네 살이 되던 1895년 피카소는 가족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이사했고 그곳의 명문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원래는 입학할 나이가 되지 못했으나 워낙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피카소에게 학교는 예외를 적용해 입학을 허가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과 형식을 강요한 학교 수업에 염증을 느낀 그는 수업을 빠지고 바르셀로나를 배회하며 도시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결국 1897년 피카소는 마드리드로 옮겨 상 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피카소는 고전적인 주제와 기법에만 초점이 맞춰진 교육에 실망하고 만다. 이 무렵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맨날 똑같은 것만 계속하고 있어. 그림은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조각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뿐이라니까.” 결국 그는 또다시 학교를 벗어나 거리를 배회하며 집시와 거지와 창녀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1899년에 피카소는 바르셀로나로 되돌아와 그곳에서 많은 예술가, 지식인들과 교류한다. 그들은 주로 ‘네 마리 고양이’(El Quatre Gats)라는 이름의 카페를 아지트로 삼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무정부주의자들, 급진주의자들의 영향으로 그는 자신이 훈련받은 고전적인 방식과 결정적으로 벗어나 평생을 통한 실험과 혁신의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피카소는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한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긴 작품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그의 그림들은 한 사람의 작품으로 여겨지기에는 너무도 다채로웠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보여주는 다양성이 급격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각각의 작품 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효과를 얻기 위해 가장 적합한 형식과 기법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러 다른 주제들은 각기 다른 표현의 방식을 요구합니다. 이는 진화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죠. 그것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과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피카소의 작품 활동은 흔히 ‘청색의 시기“(Blue Period), ’ 장미의 시기‘(Rose Period), ’ 큐비즘의 시기‘(Cubism Period), ’ 고전 시기‘(Classical Period), ’초현실주의 시대‘(Surrealism Period)와 그 이후의 시기로 구분한다. 첫 번째, ’ 청색의 시기‘는 1901년에서 1904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데, 이 시기에 피카소는 거의 모든 작품에 압도적으로 ’ 푸른색‘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로 옮겨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었는데, 그와 함께 바르셀로나를 떠나 파리로 왔던 절친한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Carlos Casagemas)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자 깊은 상실감과 우울함에 빠지게 된다. 그 감정을 그는 푸른색과 녹색의 어두운 색조를 사용해 가난, 고립, 번민과 같은 주제로 표현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 푸른 누드‘(Blue Nude), ’ 인생’(La Vie), ‘늙은 기타리스트’(The Old Guitarist)가 있는데 모두 1903년 같은 해에 완성되었다.

푸른 누드(1903)

두 번째 ‘장미의 시기’(1904~1906)는 우울함과 외로움을 극복하고 보다 따뜻한 색채---베이지, 핑크, 붉은색---들을 사용했던 시기였다. 이 시절 그는 올리비에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모델과 열렬한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세잔과 고흐를 세상에 알린 전설적인 미술품 거래상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대표작으로는 ‘곡예사 가족’(Family of Saltimbanques, 1905),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905-06) 그리고 ‘두 개의 누드‘(Two Nudes, 1906) 등이 있다.

곡예사 가족(1905)

세 번째 시기를 규정하고 있는 큐비즘은 피카소와 그의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던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에 의해 형성된 화파(畫派)를 가리킨다. 이들의 작품 속에서 대상은 해체되었다가 추상적인 형태로 재현된다. 기하학적 형태를 강조하여, 물리적 현상을 거부하고, 콜라주와 같은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면적이면서 동시적인 관점에서 대상을 묘사한다. 파괴적이면서 동시에 창조적이었던 큐비즘의 등장은 미술계를 경악시키고 매료시켰다. 1907년에 발표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큐비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섯 창녀들의 누드를 그린 이 작품은 이전의 어떤 작품과도 구별되어 20세기 회화의 방향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동료 브라크는 이 그림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 “누군가 가솔린을 마시고 불을 뱉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피카소의 친구였던 프랑스 시인 막스 자코브(Max Jacob)는 큐비즘을 가리켜 새로운 세기의 “혜성과 같은 전령‘이라 부르며 ”입체파는... 그림을 위한 그림이다. 문학에서의 큐비즘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현실을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 사용한다. “라고 언급하였다. 큐비즘 시기의 초기 작품들은 ’ 분석적 큐비즘‘으로 분류되는데, ’세 여인‘(Three Women, 1907), ’ 탁자 위의 빵과 과일 접시‘(Bread and Fruit Dish on a Table, 1909), ’ 만돌린을 든 소녀‘(Girl with Mandolin, 1910)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반면 ’ 종합적 큐비즘‘으로 불리는 후기 작품들은 그 시대의 전형적인 회화들과는 더 크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대표작으로는 ’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Still Life with Chair Caning, 1912), ’ 카드 치는 사람들‘(Card Player, 1913-14), ’세 명의 연주자들‘(Three Musicians, 1921) 등이 있다.

아비뇽의 처녀들(1907)

‘고전 시기’는 대체로 1918년에서 1927년 사이의 기간을 가리키는데 이 시기에 실험적 회화에서 벗어나 잠시 사실주의로 회귀한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피카소의 회화에 커다란 변화가 초래되는데, 좀 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현실에 대한 묘사에 몰두한다. 주요 작품으로는 ‘봄의 세 여인’(Three Women at the Spring, 1921), ‘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경주‘(Two Women Running on the Beach/The Race, 1922), ’ 팬파이프‘(The Pipes of Pan, 1923) 등이 꼽히고 있다.

봄의 세 여인(1921)

1927년부터 피카소는 ‘초현실주의’에 경도되는데 사실 이는 그가 창안한 큐비즘과 궤를 같이 하는 철학적, 문화적 운동이었다. 피카소의 가장 유명한 초현실주의 회화는 20세기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는 ‘게르니카’(Guernica, 1937)였다. 프랑코의 국민당을 지원하는 나치 독일의 폭격기들이 게르니카의 바스크 마을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자 그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분노와 항거의 뜻을 담은 작품이었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단순하고 아이와 같은 이미저리와 투박한 기법을 보이고 있다. 노년에 접어든 그는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저 아이들만 했을 때, 난 벌써 라파엘처럼 그릴 수 있었지. 이제 저 아이들처럼 그리게 되는데 한 평생이 걸렸어.” 노화가의 이 말은 예술의 본질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것은 예술적 순수함이야말로 그 어떤 기법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게르니카(1937)

2차 대전 이후 피카소는 공공연히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어 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는 1950년과 1961년 두 차례에 걸쳐 국제 레닌 평화상을 받기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살아있는 예술가가 되었다. 파파라치들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했지만 그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예술을 창조하려 노력하였고 말년에도 작품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거의 미신적이라 할 정도로 미술만이 자신을 살아있게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말년의 대표작은 연필과 크레용으로 그린 ‘죽음을 마주한 자화상’(Self Portrait Facing Death, 1972)으로 세상을 뜨기 일 년 전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투박한 기법을 사용한 이 그림은 초록의 얼굴과 핑크색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과 유인원의 중간쯤으로 보인다. 하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지혜와 더불어 두려움과 불확실성의 표정은 절정의 기량을 가진 대가의 작품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마주한 자화상(1972)

피카소의 그림들 대부분에 여성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여성에 대한 그의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생을 통해 그는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세 여인과의 사이에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1918년 결혼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발레단 ‘발레 뤼스’의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Olga Khokhlova)였다. 그녀와의 만남은 피카소는 발레 무대의 디자인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그는 재정적인 이유로 그녀와 이혼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1955년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은 결혼 상태를 유지했다. 1927년 46세의 피카소는 17세의 마리-테레스 월터(Marie-Thérèse Walter)라는 여성을 만나 은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녀와의 사이에 마야라는 딸이 태어나기도 하였으나 피카소는 첫 번째 부인이 죽은 후에도 그녀와 결혼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피카소와 결혼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던 그녀는 피카소가 세상을 뜬 지 4년 후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1930년대와 40년대에 피카소는 여류 사진작가이자 화가였던 도라 마르(Dora Maar)와 친구이자 연인으로서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피카소의 여성 편력은 계속되었다. 1940년대 중반 그는 프랑스와 길로(Françoise Gilot)와 내연의 관계를 맺어 아들과 딸을 얻는다. 그럼에도 피카소는 1962년 재클린 로크(Jacqueline Roque)라는 여성과 결혼한다. 두 번째 부인과는 그가 죽을 때까지 부부로서 함께 하지만 그녀 역시 남편의 사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첫 번째 부인인 올가, 그리고 피카소와 오랜 연인 관계였던 도라는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파울로는 치명적인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손자 역시 둘째 부인에 의해 할아버지인 피카소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자유로운 여성 편력과 평탄치 않은 관계 속에서 여성은 피카소의 삶과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바람둥이에 여성 혐오주의자였을지 모른다. 한때 그는 연인 질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게 여성은 단지 두 종류뿐이야. 여신이거나 신발 바닥을 닦는 도어매트인 거지.” 그가 그려낸 사랑했던 여인들의 모습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었을까?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깨닫게 하는 거짓입니다.”(Art is a lie that makes us realize the truth.) 그의 말대로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진실을 알게 하는 거짓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모든 창조의 행위는 무엇보다도 파괴의 행위이다.”(Every act of creation is first of all an act of destruction.) 그에게 여성은 그저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그는 성인이 된 이후 거의 모든 세월을 보낸 프랑스에서 숨을 거두고 그곳에 묻힌다. 92년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피카소 그는 어디에나 있는 존재이다. 내 작은 서재 벽에도 피카소의 여인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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