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Jan 17. 2021

굿바이, 더 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

기형도, 빈집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An Empty House

          by Ki, Hyung-do     


Losing love, I am writing.    


Good-bye, brief nights,

Winter fogs drifting outside the window,

Candles not knowing anything, Good-bye. 

Pieces of white paper waiting for fear, 

Tears in place of hesitation,

Good-bye, aspirations that are not mine any more.     


Like the blind, I feel my way to the door and close it.

My poor love has been locked in an empty house.      


글을 쓰는 사람은 가끔 절망합니다. 흰 종이를 앞에 두고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때,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을 때, 그저 망연히 앉았거나, 금단 증상에 빠진 중독자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왜 그리 글 쓰는 일에 집착하느냐고. 힘들 때는 컴퓨터 화면에서 벗어나 있으라고. 그러고 싶지만 그게 잘 안되네요. 차라리 흔들리지 않는 낚싯대를 바라보는 낚시꾼이 되는 것이 편합니다. 흰 여백에 채워지는 글자 하나하나가 희망이고, 쾌락이고, 절정이기 때문입니다. 시인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니지만 누군가의 가슴을 뛰게 하는 글을 쓸 수 있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한갓 자기만족만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름다운 시와 감동적인 글을 읽는 것만큼이나 무언가를 써보고 싶습니다.     


시인은 사랑을 잃고 글을 씁니다. 하지만 무엇도 쓸 수 없게 되자 주변의 많은 외로움과 이별을 고합니다. 밤과 안개와 촛불, 그리고 애증의 그 흰 종이. 망설임 속에서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렸던 기억까지 그 모두와 헤어지고자 합니다. 창작의 고뇌 속에 품었던 열망들은 무기력 속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더듬거리며 문을 찾아 애써 그것을 닫아버리고 맙니다. 잃어버린 글자와의 사랑은 그 문 안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시인의 시를 제 멋대로 해석했지만 원래 글이라는 것이 쓰고 난 뒤에는 읽는 사람의 몫이니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 써지지 않은 시의 마지막 구절을 상상합니다. 빈 방에 갇힌 그 사랑을 이제 잠시 뒤 문을 열어 다시 찾고 싶다는 것. 

매거진의 이전글 내게도 기다리는 고래가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