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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an 20. 2021

맹목적인 충성심의 끝

충성과 아첨 사이

충성심은 미덕이다. 하지만 충성에는 원칙이 따라야 한다. 명분이나 믿음, 한 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은 옳은 일이 아니다. 그럴 때의 충성은 쉽게 부정한 행위의 도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한 독일인들의 맹목적인 충성이 인류의 역사에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는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탈린의 KGB는 수많은 음모와 암살의 도구였다. 파시즘과 쇼비니즘의 전체주의적 집단 충성심은 수많은 악행의 근원이었다.     


정치의 영역에서 충성심은 더욱 왜곡되기 쉽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였던 엘버트 허바드(Elbert Hubbard)는 “작은 충성심은 많은 현명함만큼의 가치가 있다.”(An ounce of loyalty is worth a pound of cleverness.)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한 조직의 굳건함은 그 조직원들의 헌신과 성실함에 달려있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태도는 자칫 한 권력자의 의중이나 신념에 모든 민주적 결정 메커니즘이 일사불란하게 봉사하는 위험이 따르기 쉽다. 특히 과거의 국회가 고무도장(rubber stamp)이라 불릴 정도로 독재자의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추인하는 기구로 전락한 것은 군주시대에 신하들이 보였던 눈먼 충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이 있다. 왕은 '배'고 백성은 '물'이라는 뜻이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엎기도 한다. 왕이 백성의 뜻에 역행하면 언제든 백성에 의해 몰락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역사를 통해 수없이 반복된 진실이다. 그래서 간언(諫言)이나 충언(忠言) 혹은 직언(直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신하가 충신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충신은 결국 왕이 만든다. 충언역이(忠言逆耳)라고 한다. ‘잘못을 지적하는 말은 귀에 거슬린다’라는 뜻이다. 현명한 지도자는 귀에 거슬리는 말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충언과 간언이 자유로이 이루어질 수 있고, 그것이 올바른 치세의 덕목인 것이다. 현대의 민주주의도 결국 군주민수의 정신이고 귀에 거슬리는 충언의 수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새겨야 하는 이유이다. “국가에 대해서는 언제나 충성하라. 그러나 정부에 대해서는 그만한 자격이 있을 때만 충성하라.”       


개인적 관계에서 충성심은 사랑이다. 우정은 지속적인 것이고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상대에게 충실하고, 그 약점까지도 덮어주는 아량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도 친구의 옆에 서는 굳건함이다. 하지만 친구의 잘못에 눈 감는 일은 결코 우정일 수 없다. 진정한 솔메이트는 서로 잘 어울리는 사람만이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저 비난을 위한 비난이 아니어야 한다. 경솔한 판단으로 친구의 뜻을 폄훼해서도 안 된다. 우정을 위한 충성심은 변함없는 성실성이다. 그것이 우정을 이룬다.     


그는 여섯 종류의 거짓말쟁이 일지 모른다.

열 종류의 바보일지도.

그는 이성과 규칙을 넘어서는

사악한 야심가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파멸과 비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존경하지는 않지만, 그를 사랑한다.

그는 내 친구이기 때문이다.     


He may be six kinds of a liar

He may be ten kinds of a fool.

He may be a wicked high flier

Beyond any reason or rule.

There may be a shadow above him

Of ruin and woes to impend

And I may not respect, but I love him,

Because -- well, because he's my friend.    


미국의 한 무명 시인이 쓴 충성심‘(Loyalty)이란 제목의 시 일부이다. 거짓말쟁이에 바보, 그리고 허황된 야심가인 친구를 두고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친구에 대한 충성심, 우정인 것이다.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는 그를 비난하지만

솔직하고 다정하게 이야기한다.

등 뒤에서 험담하는 것은 후회를 남긴다.

사람들이 내 앞에 그를 쳐 쓰러뜨려도

그를 도표화하고

그의 영혼의 지도를 그리지는 않았다.

나는 분석하지 않는다—다만 그를 사랑할 뿐이다.

그는 내 친구이기 때문이다.  


I criticize him but I do it

In just a frank comradely key

And back biting gossips will rue it

If they ever knock him to me!

I never make diagrams of him

No maps of his soul have I penned,

I don't analyze -- I just love him,

Because -- well, because he's my friend.     


친구의 잘못에 대해 비난을 아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친구를 비난할 때는 칭찬할 때보다 더욱 신중해야 한다. 충고랍시고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일방적인 교훈의 말을 던지는 것은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역효과를 부를 뿐이다. 내가 나에게 관대한 만큼 그에게도 관대한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부드럽게 조언해야 한다. 그래야 친구다운 비난이다. 이 시의 백미는 친구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그의 영혼을 재단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마음을 준 친구를 분석하는 것은 우정이 아니다.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충언만이 친구에 대한 배려이고, 우정의 표식이다.     


세상 이치가 다 마찬가지이다. 온 마음을 바쳐 누군가를 섬기는 일, 내가 속한 조직을 위해 몸을 바치는 충성심은 미덕이다. 하지만 그것이 섬기는 사람을 망치고, 나의 울타리를 부수는 일이 된다면 그것은 악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충성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해, 안락한 삶을 위해, 미움을 사지 않는 처세를 위한 아첨이고, 모두의 파멸로 이끄는 첫걸음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봐야 한다. 나의 충성심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디를 향하고 는 것인지.     


“모든 인간은 충성스럽다. 하지만 그 충성의 대상은 기껏해야 모호할 뿐이다.” (존 바스, 미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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