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용훈 Feb 18. 2021

한 곳은 남겨두세요

이성복, 아직 서해는 가보지 않았습니다.

한 곳 정도는 남겨두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미워하는 마음도 어느 곳인가는 비워두어야 했습니다. 모든 곳을 다 채우면 결국은 넘쳐흐를 수밖에요. 절망은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 오는 것이죠. 좌절은 이제 갈 곳이 없다는 느낌입니다. 천 길 낭떠러지 앞에서 새처럼 날개가 솟아오르길 바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인생을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영원한 C(choice, 선택)이라고 했다지요. 우리의 하루는 늘 그렇게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죠. ‘차선’(次善, the second best)이라는 말은 두 번째로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좋은 것만 취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어서 차선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남겨두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만을 남겨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조금 모자라는 것이라도 뒤에 남겨두세요.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상에서 가끔은 뒤돌아 볼 이유를 거기에 두었으면 합니다. 절절한 바람은 한 번에,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체는 언제나 부분의 합(合) 보다 큽니다. 삶은 우리에게 전체로서 던져지지 않습니다. 작은 하루하루가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러니 전체를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니까요. 작은 것, 조금 모자라는 것, 그것들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 가지려 말고, 다 써버리지 말고, 조금 남겨두세요. 언젠가는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충만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성복 시인은 서해를 남겨두었군요. 태양이 떠오르고, 광활하게 펼쳐지는 동해, 아름다운 옥색으로 빛나는 남해가 아니라 검은 갯벌이 멀리 바다를 가르고, 낙조는 슬픈 아름다움과 함께 관조(觀照)를 배우게 하는 서해를 남겨두겠다고 말합니다. 그곳을 남겨 당신의 자리를 만들고 언제나 마음에서 파도치게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보지 못한 그 어느 곳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는 존재일지 모릅니다. 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남겨두는 마음은 사랑입니다.        


서해

           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 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 보지 않은 곳을 남겨 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 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 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The West Sea

             by Lee, Sung-bok     


I have not ever been to the West Sea

Because you may be there.     


Is the Sea there different from the others?

Tiny crabs keep going in and out of the holes in the mud flats

And the sea always tosses and turns in the distant swamp.       


For your place

I need to leave somewhere untrodden.

If I go everywhere there will be no place for you to stay.     


The one sea I’ve never been to

Always heaves up and down in my mind.  

매거진의 이전글 다른 이의 신발을 신어 보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