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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Feb 23. 2021

여태 그렇듯 그냥 스쳐가세요

이지현 : 우연히

우연히

         이지현     


우연히라도

풀잎 하나 없는 절멸의 사막에서 만나더라도

여태 그랬듯 그냥 스쳐가 다오.

까맣게 잊었다는 말을 들으면

남은 생이 더 상처일지 모르니     


우연히라도

풀잎 스치는 푸른 바람이 되어 가까이 서있더라도

여태 그렇듯 그냥 모르는 척해다오.

그리움이 모두 사라진 뒤엔

남은 생이 더 길지 모르니.     


차츰차츰 우리는 더 낮은 곳으로 지고

긴 그림자 하나 벽에 그을음을 남기며 사라지는

그런 계절의 한 복판에서 불현듯 떠올려다오.

누군가 한 번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편지를 쓰고 있었음을.     


깊거나 아득함은 겪은 자만이 모른 채

이미 도처에 엎드려서 우리를 에워싼다.

울지 않는 자만이 거리를 오가고

저릿한 비명은 남은 자만이 부르는 노래다.     


우연히라도

어떤 울음을 들으면 그곳에 깔린

깊은 눈부심도 있었다 기억해다오.

무심코 냉정한 표정으로

생과 공손히 악수하는 중일지 모르니.     


If you happen to...

               by Lee, Ji-hyun     


If you happen to

See me in a desert of extinction with no grass on it,

Just pass by as usual.

To hear that I have been completely forgotten,

I will have my remaining days more severely hurt.     


If you happen to

Stand close to me like the blue wind barely touching the grass,

Just pretend not to know as usual.

After all the yearnings disappear,

I may feel the remainder of my life even longer.     


As we gradually go down into a lower place,

Just recall unexpectedly in the middle of the season

When a long shadow fades away leaving the soot on the wall,

That someone, without being noticed,  

Was once writing a letter alone.    


The feeling of being in abyss and vague memory

Never known only to those who have suffered it

Is lying everywhere and surrounding us.

Only those who never cry come and go along the street

And the bitter scream is but a song by those who were left behind.     


If you happen to

Hear a certain cry,

Just remember the deep, brilliant light also spread there.

For it may be shaking hands with life

With a heartless and cold expression,    



남겨진 자의 슬픔은 언제부터인가 그리움으로 변해갑니다. 잊힌 자의 외로움은 상처로 깊어갑니다. 살아있는 동안 다시 만날 것을 두려워 하지만 영원히 잊힐까 안타까움은 더해 갑니다. 바람처럼 이라도 스치면 오랜 기억이 다시 살아날까 저어하지만 모른 척 지나가는 그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작은 옛 일이라도 기억해주기를 아프게 원합니다. 그날, 그 추웠던 어느 날, 시린 손을 비벼가며 사랑의 밀어를 써 내려갔던 그 간절한 모습을 떠올려주길 바랍니다. 세월이 가도 더 깊어만 가는 아득한 기억은 남겨진 그에게는 여전히 현재인 듯 온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거리를 오가는 무심한 그들을 바라보며 아직도 자신이 남겨지고, 잊힌 사람임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소리 없이 절규합니다. 아픈 이별 뒤의 공허도 세월과 함께 사라질 수 있다면!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남겨진 채, 잊힌 채, 버려진 채 살아야겠지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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