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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Feb 24. 2021

아! 전혜린...

전혜린, 저녁 기도

저녁 기도 

           전혜린     


조용하거라, 공포여, 고통이여.

곧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눈만 감고 가만히 있으면 

너는 반드시 가루가 되어 부서질 터이니, 

기다리거라, 분노여, 불안이여. 

세계가 끝났다고 네가 생각하는 날, 

참으로 끝나는 것은 다만 너의 

작디작은 심장의 움직임뿐일 것이니, 

나를 떠나거라, 애정이여, 동정이여. 

네가 집착한 온갖 대상은 

손가락으로 흘러 떨어지는 모래보다 

더 순간만의 것이고 더 무(無)인 것이니, 

잠자자, 내 감각, 내 피부.. 

우주의, 신의, 사람들의 고통을 

인공적으로라도 덜 느낄 수 있도록!     


An Evening Prayer

                by Chun, Hye-rin     


Be silent, fear and suffering. 

Everything will be over soon. 

Close your eyes and sit still

And you will be broken to pieces.

Wait, anger and anxiety. 

The day you think of the world to end

All that ends will be 

The movement of your too little heart.

Leave me, affection and compassion.

All that you cling to 

Is just ephemeral and more like nothingness

Than the grains of sand falling down between the fingers.

Sleep, my sense, my skin.

Let the sufferings of the universe, God, and humans 

Be less felt even artificially.      


전혜린은 왜 그리 고통스러웠을까? 유학 시절 뮌헨 슈바벵 거리의 가로등이 못내 잊히지 않아서 이었을까? 가부장제의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여성으로 살기가 어려웠던 때문일까? 유부녀의 신분으로 연하의 제자를 사랑했던 그 정염의 갈등이었나? 아니면 존재론적 고독과 불안의 결과였던가! 1970년대 그녀의 자전적 수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당시의 젊은 여성들의 억눌린 감성에 자유를 부여했고, 이국적 센티멘탈리티를 배우게 했었다. 그 수필집의 제목은 그녀가 좋아했고, 우리말로 번역했던 독일 작가 하인리히 뵐의 동명 장편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이혼과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 그리고 그녀를 짓눌렀던 사회적 제약과 정신의 억압, 그 모든 것들이 그녀로 하여금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하게 했던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이다.        

공포와 고통, 분노와 불안이라는 시대의 감정을 시인은 자신의 온몸으로 겪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산산이 부서져 사라질 그것들이지만 그녀는 그 좌절의 사슬을 결코 풀지 못하였다.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의 흐름이 닿았던 곳, 절망의 끝에서 그녀를 일으켰던 것은 결국 이루지 못했던 사랑이었을까. 하지만 애정과 동정마저 결별하고 그녀는 홀로 세상의 끝으로 걸어갔다. 버지니아 울프가 걸어 들어 간 그 강의 흐름에 자신을 던져버린 전혜린. 모든 것이 그저 순간임을, 허망한 무(無) 임을 깨닫고 모든 애착을 버린 순간, 그녀는 잠을 청한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이 알게 된 모양이다. 자신의 고통이 자신만의 것은 아니었음을. 그것은 우주와 신과 모든 인간의 고통임을. 아름다운 그녀가 그 시절 종로와 명동의 거리를 걸으며 숙명의 사슬 대신 서정(抒情)의 고리를 찾아내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그녀의 시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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