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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11. 2020

겨울이야기, 질투와 파국
​   용서와 화해

셰익스피어 인문학: Winter's Tale

  사람의 감정 가운데 가장 수치스러운 것이 질투의 감정이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얼마나 사악하게 변할 수 있는지, 사람을 얼마나 어리석고 편협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놀라울 뿐이다. ‘겨울이야기’에 등장하는 레온테스 왕이 좋은 예이다. 

  레온테스는 시칠리의 왕이었다. 그의 왕비 헤르미온은 매우 아름답고 정숙한 아내였다. 레온테스는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보헤미아의 왕 폴릭세네스를 시칠리로 초대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아내 헤르미온에게도 자신의 친구에게 마음을 다해 친절히 대해줄 것을 부탁한다. 마침내 폴릭세네스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때가 되자 레온테스와 헤르미온 은 그에게 조금 더 시칠리에 머물러주기를 간청한다. 왕비의 진심 어린 간청에 마음이 움직인 폴릭세네스는 몇 주 간 더 머물기로 결정한다. 바로 이것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 

  레온테스는 자신의 아내가 폴릭세네스에게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마침내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헤르미온은 단지 남편의 부탁에 따른 것뿐이었으나, 질투의 감정은 한 번 끓어오르면 무한히 커지게 마련이어서 레온테스는 마침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놀랍게도 레온테스는 자신의 신하 카밀로를 시켜 그렇듯 절친했던 친구를 암살하려고 한다. 하지만 카밀로는 왕의 명령이 그릇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폴릭세네스에게 레온테스의 계획을 알리고 그와 함께 서둘러 시칠리를 떠나 보헤미아로 달아난다.  

  질투에 사로잡힌 레온테스의 분노는 헤르미온에게 향한다.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신하들을 시켜 아폴로 신에게 아내의 부정함에 대해 물어보게 한다. 질투심이 광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임신 중이던 헤르미온은 감옥 안에서 딸을 낳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의 친구 폴리나는 감옥에 있는 갓난아이를 레온테스에게 데려간다. 아이를 보고 왕이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레온테스는 자신의 핏줄인 아이를 내다 버리라고 명령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가 정숙하다는 아폴로 신의 판정도 믿지 않는다. 그는 인간성을 상실한 괴물이 되어 간다. 

  얼마 후 어머니가 감옥에 갇힌 사실을 알게 된 아들 마밀리우스가 슬픔에 못 이겨 죽고, 감옥 속의 헤르미온도 절망 속에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아들과 아내의 죽음을 접하고서야 레온테스는 자신이 지나쳤음을 깨닫고 때늦은 후회를 한다. 

  후회와 가책 속에서 레온테스는 자신이 버린 딸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딸을 데리고 간 신하마저 소식이 끊겨 딸의 행방은 물론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다. 아이는 죽고 말았을까? 하늘이 도왔는지 아이는 한 양치기에게 발견되어 그의 손에 키워진다. 그 아이는 버려질 때 목에 페르디타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비록 양치기의 딸로 성장했지만, 페르디타는 공주로 태어나서인지 훌륭한 성품과 고상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우연히 보게 된 보헤미아의 왕자 플로리첼은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고 만다. 양치기의 딸이란 신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사랑을 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바로 폴리세넥스의 아들이었다. 

  물론 ‘겨울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플로리첼과 함께 시칠리로 돌아온 페르디타를 본 순간 레온테스는 그녀가 자신의 아내 헤르미온과 너무도 닮은 것에 놀란다. 결국 그녀를 키워준 양치기에 의해 프레디타가 레온테스의 딸인 것이 밝혀지고 죽은 것으로 알았던 헤르미온도 살아서 돌아온다. 사실 그녀는 감옥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친구 폴리나가 레온테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녀를 빼돌렸던 것이었다. 

  아내와 딸을 되찾은 레온테스는 기쁨에 넘친다. 더구나 프레디타는 보헤미아 왕자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폴리세넥스도 등장해 친구와 화해하고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 순간을 맞게 된다.     

  ‘겨울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질투와 의심이라는 감정이 가져올 수 있는 고통과 파국을 보여준다. 질투의 마음은 결국 부부간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을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가족 전체를 붕괴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페르디타는 어려움 속에서도 의연하고 품위 있는 행위와 용기를 보여준다. 그녀의 모습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품성은 빛날 수 있고 어떠한 고통에서도 아름다운 미래를 이뤄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남녀 간의 사랑에 있어 질투의 감정은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한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과 소유욕이 클수록 질투와 오해의 가능성은 커지기 마련이다. 주제 면에서 ‘겨울이야기’의 배경은 질투와 의심이다. 진실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고 믿었던 친구와 정숙한 아내 사이를 의심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친구를 죽이려 하고, 아내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 시칠리아의 왕 레온테스. 질투는 우정도, 아내와 자식에 대한 사랑도 무력하게 만들고 만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이렇듯 사악한 죄악마저도 용서한다. 죽을 위험에 처했던 레온테스의 친구 폴릭세네스도, 죽음을 가장하고 오랫동안 남편을 증오했던 왕비 헤르미온도 모두 레온테스를 용서한다. 

  ‘겨울이야기’ 속 비극을 맞은 인물은 어머니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슬픔에 빠진 나머지 죽음을 맞은 레온테스의 아들뿐이다.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아버지는 용서받고, 어머니는 살아서 남편과 딸을 만나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더구나 그의 여동생은 보헤미아의 왕자와 결혼까지 하는데, 왜 그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었는가? 

  그의 이름은 마밀리우스. 레온테스와 헤르미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들. 그의 죽음은 왠지 희생양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레온테스는 아폴로에게 신탁한다. 그리고 헤르미온의 결백이라는 답을 얻는다. 하지만 질투는 신에 대한 믿음조차 사라지게 하여 그는 신탁의 결과조차 믿지 않고 아내의 부정을 확신한다. 신에 대한 도전이며 모독이다. 결국 마밀리우스는 아버지의 신성모독에 대한 심판을 대신 받는 희생양이다. 비극(tragedy)이란 용어는 신의 제단에 바친 희생양(scape-goat/ tragos)에서 나왔다고 한다. 마밀리우스는 비극 가운데 모두의 행복을 위해 바쳐진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레온테스의 악행을 겪은 누구도 그에게 복수를 다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희극의 결말이 용서와 화해라 하더라도 보통은 부당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복수를 통해 승리를 쟁취하고 그 바탕 위에 용서하고 화해하는 법인데, 이 작품에서는 플로리첼과 페르디타의 사랑 그리고 페르디타의 고결한 아름다움만으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가로서 원숙기에 접어든 셰익스피어가 더 이상 복수와 악의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아닐까? 단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선의에 의해서 타인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페르디타처럼 누구의 마음에도 아름다움만 전할 수 있는 절대선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진정 평화롭고 순수할 수 있을 것이다.

  레온티스도 용서의 미덕을 보여준다. 비록 선의에 의해서지만 국왕의 명령을 어기고 타국의 신하가 된 카밀로, 오랜 세월 왕비의 생존을 속여 왔던 폴리나에게 레온티스는 기꺼이 용서를 베푼다. 배반과 거짓조차 용서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삶이기를 셰익스피어는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의 마음에서 의심과 질시, 악의와 분노를 배제할 수 있다면 그곳이 곧 행복의 지상낙원일 것이다.

  희비극(tragi­comedy)이라 불리는 ‘겨울이야기’는 인간의 비극적 속성과 그것을 극복해 행복한 결말을 이루어내는 해피엔딩의 희극적 요소를 아울러 담고 있다. 그리고 제 아무리 사악한 마음도 언제든 사랑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성이 위축되고, 경시당하고, 상처 입는 현대에 셰익스피어의 ‘겨울이야기’는 따뜻함 속에서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인간을 예찬하는 햄릿의 대사가 떠오르는 작품이다.     

   인간은 얼마나 멋진 작품인가! 이성은 고귀하고 능력은 무한하다!

   모습과 동작은 얼마나 명료하고 찬양할 만한가! 행동은 천사와 같고, 

   생각은 신과 같으니!

   세상의 아름다움이여, 만물의 영장이여!                


  셰익스피어의 말기 작품인 ‘겨울 이야기’는 질투에 의한 파괴와 죄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질투심에 눈이 먼 레온테스의 독백이다.    

         욕정! 욕정은 언제나 심장의 한가운데를 찌르거든;

         욕정은 믿을 수 없는 일도 가능케 하고,

         꿈 하고도 정을 통하니까;―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그것은 비현실적인 일과 결탁하고

         공허한 것과도 어울리지; 그러니 욕정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결탁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 

         과연 허용된 이상의 짓을 하고 있구먼, 저렇게. 

         그러니 내 머리는 이미 미쳐버리고 

         뿔이 돋치기 시작하는구나.

                                          (Act I, Scene 2)    

  질투는 그냥 놔두어도 뿌리를 뻗고 가지를 키워서 결국에는 몸통 전체가 그 뿌리와 줄기로 질식하고 만다. 결국 레온테스의 질투는 가족을 파괴하고, 그는 오랜 세월 후회와 번민 속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의 오해였음을 알게 된 레온티스는 절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      

         왕비와 그녀의 미덕을 회상하면,

         그것에 대한 나의 오점을 잊을 수 없소.

         그래서 나 자신이 지은 죄를 

         아직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구려.

         너무 큰 죄여서 왕국은 후계가 끊어지고,

         남자에게 희망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반려마저 잃고 말았소.

                                         (Act V. Scene 1)        

  오델로의 질투는 모두의 파멸을 불러왔지만, 레온테스의 질투와 그에 따른 죄의 대가는 용서와 화해로 대체된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약점과 결함을 숭고한 인간성의 승리로 승화시킨다. 레온테스의 죄는 처벌되지 않고, 그가 파괴했던 가족도 다시 모이고 의심으로 금이 갔던 우정도 회복된다. 아름다운 인간들의 승리와 죄의 구제 그것이 ‘겨울이야기’의 테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온테스는 아내와 친구, 딸과 사위 그리고 충성스러운 신하의 부인 등 모든 선량한 인간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하나가 된다.     

         ... 두 분 모두 날 용서하시오.

         두 분의 성스러운 눈길 사이에 내가 그만 

         사악한 의심을 놓았구려... 

         ... 훌륭한 폴리나 부인,

         우리를 안내하시오. 그곳에서 우리 서로 차분하게

         서로 묻고 대답해 봅시다. 

         우리가 처음 헤어진 이후 지금까지 

         그 광활한 시간의 간격 속에서 각자가 한

         역할에 대해 말이오. 자 서두릅시다. 

                                     (Act V. Scene 3)            

   


∎ 의심의 씨앗은 언제나 스스로 뿌린다. 레온테스의 마음에는 아내의 헌신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분별한 질투가 의심으로 변한다. 남자들은 모두 그런가 보다. 사랑하는 여인이 누군가 다른 이에게 마음을 쓰는 것은 언제나 지나쳐 보이기 마련. 그래서 스스로 만든 의심의 덫에 걸려 홀로 번민하고 무너지는 것이 나약한 남자의 심성 아닐까.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뜨겁군, 뜨거워!

         우정도 지나치면 욕정이 되는 법,

         끔찍한 전율이 나를 덮치고. 마음이 들끓어 오르는군.  

         하지만 즐거워서, 즐거워서는 아니야.   

                                             (Act I, Scene 2)    

∎ 의심은 언제나 확신이 된다. 믿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현실이 되는 듯 괴로워한다. 왜 그럴까? 왜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나약할까. 실제로 보지도 못한 그 일이 마음속에 그렇듯 선명한 이미지로, 마치 진실처럼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레온테스의 의심은 이제 확신이 되고, 고통이 된다.     

         내 추측, 내 판단이 적중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하지만 차라리 몰랐다면! 이럴 땐 다행이 불행이구나!

         거미가 빠진 술잔이라도 

         모르고 마시면 그만.

         그러나 그걸 눈으로 보고, 

         어떤 술을 마셨는지 알면

         구역질로 목이 갈라지는 듯,

         옆구리가 터지는 듯,

         광란이 난다.

                                          (Act II, Scene 1)    

∎ 죄는 후회를 부르는 법. 레온테스는 아들의 죽음,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되자 비로소 자신의 의심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무한한 죄책감과 애정을 느낀다. 왜 우리는 죄에 빠져 마음을 잃고, 그 후에야 후회를 하는 것일까? 후회 없는 삶은 불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그 나날의 슬픔과 가책은 또 어찌할 것인가.      

         하루에 한 번 씩

         그들이 누운 성당을 참배하고, 눈물로

         내 기쁨을 삼겠소. 이러한 일과에 

         내 몸이 지탱하는 한

         이를 계속하겠다고 맹세하오. 오시오 나를 

         이 슬픔이 기다리는 곳으로 데려다주오.    

                                      (Act III, Scen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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