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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ul 03. 2021

복수, 모두의 파멸

티투스 안드로니쿠스

내 마음엔 복수심이, 내 손에는 죽음이

피와 복수가 내 머리를 방망이질한다.

(아론, 2막 3장)

Vengeance is in my heart, death in my hand,

Blood and revenge are hammering in my head.


티투스 안드로니쿠스(Titus Andronicus)는 말 그대로 유혈 낭자한 복수의 비극이다. 1588년에서 1593년 사이에 나온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이고, 그의 최초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조지 필(George Peele)이라는 동시대 작가와의 공저로 알려져 있다. 사실 16세기의 관객들은 폭력적인 피의 복수에 환호했고, 이 작품은 그러한 대중들의 기호에 맞추어 당시에는 엄청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점차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지게 된다. 특히 엄격한 도덕률이 강조되던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작품의 폭력성으로 해서 공연 목록 자체에서 배제되기도 하였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다소의 관심을 받기도 했으나 여전히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알려지지 않은 작품 중 하나이다.     


미국 일리노이 대학 명예교수이자 문학사가인 S. 클락 휼스(S. Clarke Hules)에 따르면 ‘티투스 안드로니쿠스’에 묘사된 “14 건의 살인 중 9 건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6 건의 신체 절단, 강간과 생매장, 광증과 식인주의가 등장하고, 각각의 막에서 평균 5.2회의 악행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작품 97 줄마다 한 차례씩 폭력이 벌어지는 셈”이라고 한다. 고전적인 연극 전통에서 살인은 대체로 무대 밖에서 벌어지고 등장인물의 대사나 밖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로 대체되고 있었던 점과 비교하면 놀라우리만치 노골적인 폭력의 행태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이 오르면 로마 제국 황제의 두 아들인 사투르니누스와 바시아누스가 부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직을 놓고 경쟁한다. 그때 집정관인 마르쿠스 안드로니쿠스가 등장해 국민들이 원하는 황제는 자신의 형인 티투스 장군이라고 선언한다. 얼마 뒤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한 티투스가 다섯 명의 포로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온다. 그 다섯은 그가 정복한 고스 국(國)의 여왕 타모라와 그녀의 세 아들 그리고 여왕의 은밀한 연인, 무어 출신의 아론이었다. 티투스는 스무 명이 넘는 아들들을 전장에서 잃었으므로 그들을 위한 매장 의식에 적국이었던 고스의 여왕 타모라의 큰 아들을 제물로 삼는다. 이로써 티투스는 타모라의 증오와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후 티투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는 청원을 받지만 자신이 늙었다는 이유를 내세워 고사하고 전 황제의 아들인 사투르니누스를 황제로 옹립한다. 그리고 타모라와 그녀의 남은 두 아들을 새 황제에게 바친다.         


사투르니누스는 티투스의 딸인 라비니아를 황비로 삼으려 하지만 그녀의 연인이었고 은밀히 결혼을 약속한 황제의 동생 바시아누스가 반대하고 나선다. 라비니아의 오빠 무티우스가 바시니우스를 사랑하는 여동생을 돕자 분노한 티투스는 자신의 아들 무티우스를 죽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투르니누스는 아름다운 타모라에게  매혹되고 결국 그녀를 황비로 선택한다. 그리고 타모라의 남은 두 아들과 아론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킨다.    


한편 타모라의 두 아들들은 티투스의 딸 라비니아를 마음에 두고 경쟁을 벌인다. 그러자 아론은 두 아들에게 정 그녀를 깆고싶다면 황제의 사냥 행사에서 기회를 보아 라비니아를 강간하도록 부추긴다. 또한 아론은 은밀히 사냥터 부근의 숲에 황금을 묻어두는데 이는 타모라와 공모한 바시아누스 살해 음모였고, 이후 그 죄를 티투스의 아들들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계략이었다. 사냥 행사 중 타모라의 아들들이 바시아누스를 죽이고 그 시체를 황금을 묻어둔 곳 근처 구덩이에 던져놓는다. 그리고 라비니아를 잡아 그녀를 짓밟는다. 그 시간 아론은 티투스의 아들들을 시체가 놓인 구덩이로 유인해 사투르니누스 황제의 눈에 띄게 한다. 결국 티투스의 아들들은 황금을 얻기 위해 황제의 동생을 살해한 누명을 쓰게 된다.   

  

티투스의 동생 마르쿠스는 조카인 라비니아가 강간을 당하고 피를 흘리며 숲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잔인하게도 타모라의 두 아들들은 그녀를 범한 후  그 죄를 숨기기 위해 그녀의 손과 혀를 절단했던 것이다.    


사냥터에서 돌아온 티투스는 바시아누스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두 아들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간청하지만 거부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티투스의 아들 루시우스는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형제들의 무죄를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로마에서 추방당한다. 루시우스의 어린 아들과 티투스, 그의 딸 라비아나와 동생 마르쿠스가 다시 모이게 되자, 아론은 집요한 복수를 계획한다. 그는 티투스 집안의 누군가가 손을 잘라 황제에게 속죄의 표시로 보낸다면 티투스 아들들을 사면해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그러자 티투스는 자신의 손을 잘라 아론에게 보내지만 돌아온 것은 아들들의 잘린 머리뿐이었다.     


충격에 빠진 티투스는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른다. 더욱이 그는 누가 자신의 딸 라비니아를 강간하고 손과 혀를 잘랐는지를 알게 된다. 그녀는 손이 잘린 팔로 책의 페이지를 넘겨 형부에게 강간당하고 혀를 잘린 필로멜라의 이야기가 적힌 부분을 가리키고, 두 팔로 막대기를 들어 모래 위에 타모라의 아들들 이름을 적었던 것이다.    


한편 타모라는 갓 출산한 사내아이를 아론에게 보낸다. 그 아이는 무어 출신인 아론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피부가 검었고  타모라는 간통의 표식인 아기를 아론이 죽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아론은 유모를 살해하고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달아난다.     


티투스는 이제 광인이 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로마의 신(神)들에게 도전하는 메시지를 화살에 묶어 사투르니누스 황제의 궁으로 쏘아 보낸다. 또한 부하를 통해 비둘기두 마리와  칼을 황제에게 보내기도 한다. 사투르니누스는 티투스가 보낸 전령을 그 자리에서 죽이고 자신을 위협한 티투스를 결코 살려두지 않으리라 맹세한다.     


마침내 추방되었던 티투스의 아들 루시우스가 고스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한다. 그때 도망했던 아론과 그의 아들이 루시우스의 병사들에게 포로로 붙잡힌다. 루시우스는 아론에게 바시아누스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밝힌다면 그의 아들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한다. 한편 타모라는 미쳐버린 티투스가 루시우스와 고스의 군대를 설득해 되돌릴 수 있으리라는 바람으로 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대가로 자신의 아들을 티투스에게 넘긴다. 그곳에서 그들은 고통 속에 살아온 라비니아와 마주친다. 가련한 딸의 모습을 보며 증오심에 사로잡힌 티투스는 그들을 죽여 그들의 어미에게 먹이겠다고 선언하고 라비니아와 함께 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렇게 복수의 고리는 이어진다. 


티투스는 사투르니누스와 타모라를 위한 연회를 연다. 그는 황제와 황비의 옆에 베일을 쓴 라비니아를 앉힌다. 그는 황제에게 비르지니우스가 자신의 딸을 죽여 수치를 겪지 않도록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황제가 그 이야기에 공감을 표하자 티투스는 칼을 들어 라비니아를 찌른다. 그리고 타모라의 아들들이 그녀에게 행한 죄악에 대해 말한다. 사투르니우스는 타모라의 아들들을 부르도록 명하지만 티투스는 그들이 이미 연회에 와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타모라와 다른 이들이 먹고 있던 파이에 넣은 고기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티투스가 마침내 타모라를 칼로 찔러 죽이고, 사투르니우스가 티투스를, 루시우스가 사투르니우스를 죽인다.  선과 악이 혼재되어 구분할 수 없는 카오스의 세상이다.


죽어, 죽어라 라비니아. 수치심과 함께.

그 수치심과 함께 아비의 슬픔도 죽으리라!

(티투스. 5막 3장)

Die, die, Lavinia, and thy shame with thee,

And with thy shame thy father’s sorrow die!



이어지는 혼란 속에서 마르쿠스가 티투스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 루시우스를 불러 끔찍했던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도록 한다. 그는 범죄의 주역은 감옥에 갇힌 아론이었다고 말한다. 극은 루시우스가 황제가 되고, 뉘우침 없는 아론을 산 채로 매장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끝을 맺는다. 로마인들은 황실의 예법에 라 티투스와 라비니아의 장례를 치르고, 루시우스는 타모라의 시체를 새들의 먹이로 던져버린다.  


나는 천 가지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지.

마치 파리 한 마리를 죽이듯이 말이야.

하지만 진정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그 열 배의 죄악을 저지르지 못한다는 사실뿐이야.

(아론, 5막 1장)

I have done a thousand dreadful things

As willingly as one would kill a fly,

And nothing grieves me heartily indeed

But that I cannot do ten thousand more.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가리켜 ‘잔인성의 비극’(tragedy of cruelty)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비극은 무수한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문학용어는 권선징악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는 악인만이 아니라 정의롭고 선한 인물들도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시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극의 고통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 혹은 도덕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받지 않아도 될 불행’(undeserved misfortune)을 겪음으로써 왜곡된 삶과 세계를 멸절하고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대한 이러한 고전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는 지나칠 정도로 폭력이 난무하고,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다. ‘리처드 3세’(Richard III)에서는 11명의 주검이 무대를 채우고, ‘리어 왕’(King Lear)에서도 10 명의 등장인물이 죽음을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투스 안드로니쿠스’에 그려진 14 건의 죽음보다 더 잔혹한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곳에는 강간 이후의 신체 절단, 산 채로 매장하기, 시체로 만든 파이 등 엽기적인 상황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T. S. 엘리엇은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를 가리켜 “지금까지 발표된 희곡 가운데 가장 어리석고 무감동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혹평하였다. 사실 자식의 사체를 먹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너무도 강력해서 17세기 초의 많은 예술가들은 그 이야기를 희극과 비극, 풍자의 소재로 삼기도 하였다. 그 엽기적 내용으로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는 현대 ‘호러 영화’의 원조로 불리기도 한다.       


셰익스피어는 오비디우스의 서사시인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 6권에 나오는 필로멜라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필로멜라는 형부인 테레우스에게 강간을 당하고 혀를 잘린다. 그의 언니인 프로크네는 동생의 복수를 위해 아들을 죽여 남편 테레우스의 저녁 식탁에 올린다. 이런 이야기는 로마의 극작가 세네카의 ‘티에스테스’에도 등장한다. 티에스테스의 형 아트레우스는 복수를 위해 동생의 아들을 죽여 만든 수프를 티에스테스에게 먹인다. 이러한 식인주의의 엽기적인 행위가 셰익스피어의 ‘티투스 안드로니쿠스’에서 재현되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희곡들 속에서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복수극’이라는 장르는 영국에서 16세기 토마스 키드(Thomas Kyd)의 ‘스페인의 비극’(Spanish Tragedy)이나 존 웹스터(John Webster)의 ‘백색 악마’(White Devil) 같은 작품들에 의해 새로이 등장하게 된다. 비평가들은 셰익스피어가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를 통해 선배들의 복수극보다 훨씬 강력한 폭력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이 우스꽝스러울 만치 과도한 복수극 속의 폭력에 대한 일종의 조롱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작품으로서 ‘티투스와 안드로니쿠스’는 당대의 대중들의 기호를 감안한다 치더라도 지나치리만치 폭력적이고 자극적이다. 인간의 심성에 대한 극단의 부정적 시각을 생경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비평가들은 이 작품은 조지 필과 같은 대중 작가의 작품에 셰익스피어가 약간의 가필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극작에 오명을 씌우는 점이 없지 않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은 인류의 오랜 역사에 지속되어 왔던 논쟁에 대한 선명한 주제를 제시한다. “복수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리스 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 주인공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인다. 그의 패륜적 행위는 복수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 신의 판결은 그에게 무죄를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복수가 복수를 낳는 ‘죄의 고리’를 끊기 위한 고뇌의 결정이었다. 현대의 소설과 영화, 웹툰 만화 속의 수많은 복수는 과연 오늘의 우리들의 심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모두의 자멸로 끝나는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는 복수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는 또 다른 문학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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