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Coriolanus)는 자만심과 실패한 배신에 관한 비극이다. 1605년에서 1608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비극으로 간주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학자들 중 일부는 이 두 작품을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티투스 안드로니쿠스(Titus Andronicus)와 함께 로마의 역사를 다룬 역사극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극은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장군 카이우스 마르티우스 코리올라누스(Caius Martius Coriolanus)의 삶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코리올라누스’라는 호칭은 마르티우스가 적국인 볼스키의 코리올리(Corioli)를 함락한 후 공적을 인정받아 얻게 된 경칭이다. 그는 그 승리로 원로원에 의해 집정관에 추대된다. 하지만 그는 집정관에 오르기 위한 평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한다. 용감하고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그는 지극히 자부심이 강하고, 성숙하지 못했으며, 고집스러우리만치 귀족적인 태도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경멸하였다. 이런 그에 대한 민중들의 거부감과 평민을 대변하는 호민관들 사이의 갈등으로 그는 결국 집정관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집정관이라는 자리는 최고의 행정 권한을 갖는 단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됨을 뜻하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기근과 지배계급에 대한 적대감으로 군중들의 폭동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극의 1막은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던 귀족 메네니우스 아그리파가 폭동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한 순간으로 시작된다. 그때 젊고 오만한 장군 카이우스 마르티우스가 등장해 시키니우스 벨루투스와 주니우스 브루투스가 평민들을 옹호하는 호민관에 임명된 사실에 분개한다. 이렇듯 계급 간의 적대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적국인 볼스키족의 군대가 로마를 침공한 사실이 알려지고 마르티우스는 로마의 병사들을 이끌고 적과 맞선다. 더구나 적의 장군은 마르티우스의 라이벌 툴루스 아우피디우스였다.
2막이 시작되면 마르티우스의 어머니 볼룸니아는 아들의 정숙한 아내 비르질리아와 함께 마르티우스의 무용을 칭송한다. 마르티우스는 볼스키의 도시 코리올리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볼스키의 군대를 패퇴시켰던 것이다. 로마로 개선하자 원로원은 마르티우스를 코리올라누스로 명명하고 집정관에 임명하기로 결정한다. 볼룸니아는 아들에게 그 직위를 받아들이라고 강권한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집정관에 오르기 위해서는 겸손의 표시로 평민들의 투표를 거치게 되어있었다. 코리올라누스는 집정관의 자리가 탐나기는 했으나 평민들 앞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를 비롯한 주위의 설득으로 그는 그 제안을 수용하게 된다. 평민들은 그의 오만함에 대해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초기에는 그를 집정관으로 선출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호민관인 시키니우스와 브루투스가 코리올라누스의 집정관 취임을 적극 반대하자 평민들은 자신들의 결정을 철회한다.
3막에서 코리올라누스는 이전투구의 정치적 논쟁 속에서 평민들과 소위 평민에 의한 민주정치라는 것에 대한 경멸감을 드러낸다. 그는 평민들이 가지고 있던 옥수수 공급권을 부정하고,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호민관이나 평민들과 화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평민들이 그를 로마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하자 코리올라누스는 분노와 모멸감에 사로잡혀 안티움이라는 볼스키족의 도시로 향한다. 한 때 적국의 대장이었던 아우피두스는 코리올라누스를 찬양하며 환대한다. 그들은 함께 로마를 칠 계획을 논의한다.
한편 4막에서 로마의 호민관들과 평민들은 코리올라누스가 떠났다는 소식에 환호하지만 그들은 곧 그가 볼스키의 아우피두스와 손을 잡고 로마를 칠 것이라는 소식에 접하게 된다. 그러자 그의 보복을 두려워한 로마는 코미니우스와 메네니우스를 사절로 보내 코리올라누스를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모든 회유를 거부한다. 마침내 그의 어머니 볼룸니아와 아내 비르질리아 심지어 그의 어린 아들까지 코리올라누스를 설득하기 위해 로마를 떠난다. 어머니와 가족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었던 코리올라누스는 결국 화해에 동의하고 만다.
5막에서 아우피두스는 코리올라누스가 로마 정벌의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의 신뢰를 배신한 것에 대해 분노한다. 결국 그는 병사를 뽑아 코리올라누스를 급습하여 그를 살해한다. 그렇게 로마의 젊은 장군은 허망하게 죽음을 맞는다. 코리올라누스를 죽인 후 아우피두스는 스스로의 다짐을 꺽기는 했으나 용맹한 전사였던 마르티우스 코리올라누스의 장례식에 참석해 경의를 표하기로 약속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성격의 비극’(tragedy of character)이라고 불린다. 주인공의 비극이 그의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비극적 결함’(하마르티아: hamartia)이라고도 불리는 이 인간의 태생적인 한계는 비극의 발생에 주된 이유가 된다. 맥베스는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몰락했고, 리어는 자신에 대한 헛된 자만심과 그에 따르는 딸들의 배신으로 황야를 헤맨다. 오셀로는 정숙한 아내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과 열등감으로 무고한 그녀를 죽이는 죄를 저질렀으며 햄릿 역시 복수에 앞서 의심과 우유부단함으로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결함은 마치 알레고리처럼 인간의 보편적이고, 어두운 심성을 상징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장 경계한 결함은 ‘자만심’(hubris)이었다고 한다. 인류가 저질러온 많은 전쟁들이 지도자들의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임은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히틀러의 병적 자부심이 유대 민족의 혹독한 시련을 초래한 것은 현대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코리올라누스’를 비극으로 분류할 때, 그 비극의 시작점은 자만심과 오만함이었다. 그는 뼈 속까지 귀족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로마 시민들의 시민권을 부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이 대중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고, 정치적 다툼으로 이어져 결국 자신이 지켜온 로마에서 추방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코리올라누스는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로마의 공화정을 부정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 얽힌 야사(野史)가 있는데, 명확한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그리스식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귀족들의 반감이 아주 오래된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 있어 이에 소개 한다: 플라톤은 몰락한 명문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시민들의 반란으로 무너지고 말았는데 이로써 플라톤은 무식한 평민들에 의해 정치가 희화(戲畫)되고 있다는 편견을 갖게 된다. 이것이 그의 ‘국가’(Politeia)에서 ‘나의 공화국에서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는 표현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플라톤은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예술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에 가장 유행했던 대중 예술이 ‘연극’이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였다. 즉 다수의 군중들이 모여 즐기는 연극이귀족에 대한 반감과 평민들의권리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심어놓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플라톤은 예술이란 현실의 그림자일 뿐이므로 ‘이데아’라는 절대적 존재를 지향해야 하는 사람들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한다. 현실은 이데아의 그림자이고 예술은 그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인 허망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평민들에 대한 경멸과 반감은 귀족으로서, 용맹한 장군으로서의 자부심과 함께 코리올라누스를 비극의 함정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그의 비극적 죽음은 자신의 믿음에 대한 나약함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바랜다. 가족의 설득에 무너진 그의 결의는 조국에 대한 배신이라는 오래된 문학의 주제를 중도에서 실패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자만은 몰락을 잉태하고, 몰락은 분노와 배신을 낳고, 그 배신은 또 다시 몰락으로 이어지는 사이클이 배신 직전에 끊기고 있는 허망하지만 흥미로운 결말이다. 그의 최종적 결함은 자만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정에 이끌린 우유부단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또 하나의 결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