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아니라 머리로 그린다."

미켈란젤로

by 최용훈

“모든 돌에는 그 안에 석상이 들어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조각가의 일이다.”

“나는 대리석 안에서 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를 자유로이 놓아주기 위해 돌을 깎았다. “

"사람은 손이 아니라 머리로 그린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전성기 대부분을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에 바쳤다. 노령으로 더 이상 공사현장에 가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그는 자택에 머물며 드로잉이나 디자인을 보내어 성당의 건축을 도왔다. 조각과 회화 건축 및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작업에 참여해 왔지만 그는 늘 스스로를 조각가로 지칭했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대리석 조각을 깎고 있었다. 8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도 성모 마리아의 부축을 받고 있는 예수를 묘사한 ‘론다니니 피에타’(Rondanini Pieta) 조각상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예술을 위해 태어나고 그를 위해 죽은 위대한 예술가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대리석 안의 천사를 찾다가 지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예술은 수백 년의 세월을 거치며 오늘날의 현대 예술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는 1475년 이태리 피렌체 공국(公國) 카프레세에서 태어난다. 그의 부친은 지방 귀족 출신의 판사였다. 태어난 몇 주 뒤 그의 가족은 피렌체로 이사한다. 1488년 미켈란젤로는 화가인 도메니코 기르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의 도제로 들어간다. 당시 그는 피렌체의 지배 세력이었던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가문에 머물고 있었으나 공화정 세력에 의해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일시적으로 축출된 후에는 볼로냐를 거쳐 1496년 로마에 도착한다. 이 초기 시절에 그는 주로 조각에 전념하는데 1499년 ‘피에타’(Pietà)를 조각해 이름을 알린다. 그는 유명 조각가가 되어 피렌체로 돌아오고 그곳에서 ‘다비드’(David, 1501-1504)를 제작한다.

‘피에타’(Pietà, 1497~1499), 다비드(David, 1501-1504)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조각가들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 양식을 따랐는데 그중에 지금은 사라진 큐피드 상이 있었다. 그의 후원자였던 로렌조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Lorenzo di Pierfrancesco de’ Medici)가 그 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이 오랫동안 땅에 묻혀있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다면 내가 그것을 골동품으로 로마에 보내 높은 값을 받아낼 수 있을 거야.”


그의 말대로 미켈란젤로는 짐짓 가짜 골동품을 만들어 그것을 리아리오 추기경에게 비싼 값으로 팔게 된다. 이후 그 작품이 가짜였음이 드러나고, 추기경은 자신이 치른 돈을 되돌려 받는다. 하지만 속임수로 만들어진 그 작품의 정교함에 감탄한 추기경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초대한다. 이후 여러 해 동안 미켈란젤로는 ‘영원의 도시’(Eternal City)라 불리는 로마에 머물며 마침내 불후의 명작 ‘피에타’를 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조각에 사용한 대리석의 선택에 유난히 까다로웠다고 한다. 하지만 잘 알려진 ‘다비드 상’은 다른 조각가들에게 외면당한 대리석 조각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이 대리석은 무려 40여 년 동안 많은 조각가들이 작업을 시도하였지만 결국은 ‘작업 불가’로 판정한 것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방치되거나 다른 조각가들의 끌과 망치질을 받았기 때문에 미켈란젤로가 그 대리석과 마주했을 때에는 돌 위에 수많은 실패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거친 대리석을 이용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분석에 따르면 그 돌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다른 대리석 작품들에 비해서는 '다비드 상'이 더 빠른 속도로 질의 저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Julius II)는 미켈란젤로를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 자신의 무덤을 설계하는 일을 맡긴다. 하지만 교황과 미켈란젤로의 의견 차이와 당시의 여러 상황들로 인해 이 작업은 완성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후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교황의 무덤을 위한 '모세'(Moses) 상을 제작하기도 한다. 1508년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The Ceiling) 작업을 맡긴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4년 동안 천장화의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일반인은 물론 교황까지 출입을 통제시키고 천장 밑에 받침대를 세워 모든 그림을 직접 그렸다. 그림에 익숙하지 않고 조각에 애착을 갖고 있던 그에게는 몹시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얼굴에는 물감이 흘러내려 피부병이 생기고, 몸은 휘어지고, 항상 목을 꺾고 작업을 하였으므로 고개가 굽혀지지 않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천장화(The Ceiling, 1508-1512) 천지창조

4년간의 작업을 마치고 1512년 10월 31일 시스티나 성당이 일반에게 공개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리고 천장에 그려진 그 거대한 광경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 위로 수천 피트 넓이의 천장에는 300명이 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었고, 창세기의 여러 장면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묘사되고 있었다. 이 위대한 작품으로 미켈란젤로는 이태리의 살아있는 최고의 예술가로 칭송을 받는다.


레오 10세가 새로운 교황에 즉위하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 있는 산 로렌초 성당의 외관을 재건축하는 일을 맡게 된다. 이 계획은 얼마 후 취소되지만 이는 미켈란젤로의 건축가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산 로렌초에 있는 메디치 성당에 줄리아노 데 메디치와 로렌초 데 메디치 형제를 위한 기념비를 설계하기도 하였다. 1505년 이래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에서 비오 4세(Pius IV)까지 9명의 교황들을 위해 일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에서 심지어는 교황의 침실 손잡이 장식에 이르기까지 그는 바티칸의 모든 부분에 간여하였다. 하지만 교황들과의 관계가 편치만은 않았다. 특히 율리오 2세의 까다로운 성격은 미켈란젤로를 자주 어려움에 빠지게 했다. 레오 10세의 경우 3년간이나 진행되던 대리석 조각 작업을 느닷없이 중단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의 교황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특히 바오로 3세는 교회 관계자들이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나체의 인물들을 외설적이라고 비난하자 미켈란젤로를 적극 옹호하기도 하였다.


1527년 피렌체의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고 공화정을 수립한다. 메디치 가문의 교황인 클레멘스 7세에게 고용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공화국의 대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공화정 정부에 의해 성벽의 축조 책임을 맡게 된다. 그는 이 일에 몰두하여 경비 요새에 대한 대규모 설계도를 만들었고 이웃 도시들을 방문해 성벽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후 교황의 군대가 다시 피렌체에 쳐들어 왔을 때 미켈란젤로의 설계는 방어에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군에게 10개월 간 포위되었던 피렌체는 마침내 1530년 함락된다. 미켈란젤로는 반역죄로 처형을 당할 수도 있었으나 클레멘스 7세 교황은 그를 사면해 다시 고용한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이 지배하는 피렌체에서 그의 위치는 미미했고, 1534년 교황이 죽자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탈출해 다시는 피렌체로 돌아가지 않았다.


10대 때에 이미 피렌체 최고의 메디치 가문에 들어간 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 분야에서 그 천재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 소리를 들어서였을까?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독설로 미움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감은 따를 수 없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에 대한 것이었다. 어느 날 언쟁 중에 한 친구가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주먹으로 미켈란젤로의 코뼈를 부러뜨려 그의 코는 평생 동안 기형처럼 휘어진 모양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한 편도 남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작품에 자신의 서명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1534년 로마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몇 년 뒤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벽에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 1537-1541)을 그린다. 이 작품에서 성자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가 벗겨낸 사람의 머리 가죽을 들고 있는데 그 얼굴이 미켈란젤로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그는 가끔씩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회화나 조각에 자신의 모습을 은밀히 끼어 넣곤 하였다.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 1537-1541)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였지만 그 시대의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수백 편의 소네트와 가곡의 가사를 썼으며 조각 작업 중에 석상을 망치로 부수며 시구를 읊조리기도 하였다. 그는 현란한 언어 구사를 통해 성(性) 문제에서 노년의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그의 시에는 “오줌이 마려워 너무 일찍 잠에서 깬다.”라는 표현까지도 등장한다. 그의 시들은 당대에 출판되지는 않았으나 16세기 로마의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으며 작곡가들은 그의 시들을 음악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다음은 미켈란젤로의 소네트를 미국 시인 롱펠로우가 ‘노년’이란 이름으로 영역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말년의 위대한 예술가가 삶의 무상함 속에서 신성으로의 귀의(歸依)를 고백하고 있다.


마침내 내 긴 인생의 여정은

부서지기 쉬운 배로 폭풍우 거친 바다를 건너,

지난날 모든 행적의 기록을 건네야 하는,

모든 이들의 항구에 도달했다.


예술을 우상으로, 나의 왕으로 섬기게 한,

저 모호하고 거대하며, 열렬했던 환상은

착각이었고,

나를 유혹하고 괴롭혔던 욕망도 헛것에 불과했다.


한 때 그토록 달콤했던 사랑의 꿈들,

지금은 어떤 모습인가, 두 개의 죽음이 내 것 일진 대

하나의 죽음은 분명하고, 또 다른 죽음은 경종을 울린다.

어떤 그림이나 조각으로도 만족시키지 못할


나의 영혼은, 십자가 위에서 두 팔 벌려

우리를 감싸는 성스러운 사랑을 향한다.


그는 ‘진정한 예술 작품도 신의 완벽함의 그림자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말년의 그는 자신의 위대한 예술적 영혼조차 하나의 환상에 불과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의 '분명했던 죽음'은 1564년 2월 18일 오후에 찾아왔다. 그것은 피렌체 출신의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가 태어난 사흘 후였고, 섬나라 영국에서 문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태어나기 두 달 전이었다. 그렇게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삶과 죽음으로 연결되어, 인류의 위대한 예술적, 사상적 고리를 이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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