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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Aug 20. 2021

불확실성의 시대

김광규 : 안개의 나라

안개의 나라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The Land of Mist

             Kim, Kwang-kyu     


In the land of mist,

Always wrapped in thick fog,

Nothing happens.

Even if anything happens,

Nothing is to be seen

Because of the mist.

While living in a dense fog,

None tries to see anything,

Used to the mist.

Therefore in the land of mist

Never try to see

But to hear.

As you cannot live without hearing

You ears get bigger and bigger.

In the land of mist

People live

With white misty ears like rabbits',    


안개의 나라, 안개의 시대. 모든 것이 자욱한 안개에 가려 희미할 뿐 그 어느 것도 분명히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모든 것이 뿌연 안개에 싸여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도 눈에 띄지 않는다. 안개는 주위의 풍경도, 나의 의식도 어둠에 가둔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알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니 사는 게 고달프다. 그저 앉아 귀 기울이다 보니 토끼처럼 귀만 커진다. 들리는 소리도 지나치게 시끄럽다. 아 안갯속에서는 차라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면...     


김광규 시인의 시 ‘안개의 나라’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흐릿한 스케치이다. 부조리한 세상을 조리 있는 말로 설명할 수 없듯이 불확실한 세상을 선명한 이미지로 그려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가치 체계가 무너지고 판단의 기준이 상실되고 모든 개념이 씨앗을 뿌리듯 산종(散種)된 세상에서는 디딤 없이 그저 허공을 떠도는 유희(遊戲)만이 가능할 것인가? 안개의 나라에 옳고 그름은 있는가. 이웃은 어디에 있는가. 언제 이 안개가 걷히고 다시 햇살 한 줄기 볼 수 있을런가? 모두가 아프고 어둠을 헤매는 시대이다. 누가 있어 이 손 잡아줄 수 있을까. 안개 저만치 작은 불빛은 여전히 깜빡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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