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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Oct 10. 2021

소크라테스 되기

아테네의 거리에 선 소크라테스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대상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라고 소리쳤지요.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믿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는 나도 나를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고 있을까요? 적어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는 싶을까요? 소크라테스의 길거리 강의 방식은 강연이나 일방적인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을 찾아내거나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의 불확실성을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죠.     


현대 사회는 질문이 없습니다. 모두 다 정해진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죠. 온라인상에 올라있는 수많은 정보들, 우리는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입각해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우리의 생활방식이 모두 던져진 정보에 의존합니다. 음식도 패션도, 오락도 전자제품도 심지어 건강까지도 수많은 매체들이 던지는 사실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거기에는 별로 질문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입니다. 이러한 현대에 소크라테스처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있을까요? 그들의 질문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있을까요?        


소크라테스의 모토는 이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당신이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당신 자신부터 알아야 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지혜는 무엇인가? 용감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의 이 질문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들이죠.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의 무미건조한 현상과 믿음에 도전하는 정신,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정신이고, 오늘의 우리에게 필요한 정신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소위 논리적 토론의 기술 즉 소크라테스적인 대화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면 정말 멋진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현대의 놀라운 과학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간의 대화나 우리의 말 뒤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더욱 깊이 캐내고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소셜 미디어(social media)라는 것을 통해 의미 없는 수많은 말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욕설과 비방, 근거 없는 모략과 인격살인이 아무런 통제 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소통하는 것보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분노와 알량한 주장, 음해와 비열한 가십만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 가짜 정보를 통해 사람들의 건강한 정신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 척박한 시대에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남에 대해,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있는 것일까요? 순간적인 판단과 오염된 믿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스스로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시대는 소크라테스가 필요합니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라고 묻고, 그 답을 스스로 찾아보려는 성실하고 진중한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젊은이들에게 보이려 했던 소크라테스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옳은 질문을 던지는데 방해가 되는 첫 번째 요인은 핵심의 결여입니다. 현대 생활은 다양한 작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까닭에 우리의 뇌는 작은 조각의 정보들을 결합하는 면에서는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우리가 듣는 이야기들과 재빨리 연결하지요.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거나 전달하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즉시 큰 그림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맙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직장 동료가 당신에게 “잘했어.”라고 말하면 당신은 즉시---부정확함에도---당신의 업무수행이 좋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동료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죠. “잘했어”가 무슨 뜻이야? 좀 더 설명해줄 수 있어? 그런 식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업무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고 그것을 당신의 업무에 활용할 지식을 얻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작은 소크라테스가 되어보는 것이죠.    


또 다른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당신의 질문이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두어 번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사실 당신을 자유롭게 해 주면서도 동시에 대립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질문을 하면 상대를 당혹하게 만들고 ‘왜 자꾸 질문을 하지?’라는 의문을 품게 합니다. 옳은 방식으로 질문을 한다 하더라도 상대가 (의식적이든 아니든) 아직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적 영역을 침범해 상대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배우기에 힘든 기술이죠. 하지만 핵심은 주변의 사람들과 더 깊은 관계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겸허함입니다. 그리고 사실에 대한 본질을 깨달으려는 정직함입니다. 질문과 대답을 통해 함께 깨닫고 성숙해지려는 노력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말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말은 “너 자신을 알라.”이죠. 그는 젊은이들에게 이것을 강력하게 가르쳤어요. “다르게 생각하는 것의 결과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젊은이들과 대면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세상에 어떤 발전이 있을까요?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한 때 이런 말을 했지요.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당신이 무언가 잃을 것이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하게 하는 내가 아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마음을 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자신의 마음을 따르는 것, 그래서 남과 달리 생각하기도 하는 것, 그것은 결코 불안한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예스’라고 말하는 세상에는 진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렇게 말해야 했던 깊은 사색이 우리를 발전시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죠.      


소크라테스는 뒷 담화를 극도로 싫어했어요.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자신의 친구인 요나에 대한 이야기를 소크라테스에게 하려 하자 그는 세 가지 질문을 던졌어요. “요나에 대해 내게 하려는 말이 진실임을 확신하는가?” 한참 생각하던 젊은이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요나에 대해 하려는 말이 그에 대한 나쁜 이야기인가?”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왜 그 이야기를 나와 나누려는 것인가?” 남을 헐뜯을 시간이 있나요?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세요. 가끔 가을 공원의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아름답고 푸른 가을 하늘에 당신의 모습을 그려보세요.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생각해보세요. 답은 언제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찾을 용기가 필요한 것이죠.       


소크라테스는 삶을 숙고하였습니다. 그는 “숙고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기원전 399년 아테네의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독약을 마시고 난 뒤 한두 시간을 그의 친구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때조차도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사(不死) 즉 두려움에 훼손되지 않는 놀랍고도 감동적인 믿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묻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믿음을 이야기하는데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죠. 그의 질문 가운데 이런 것도 있습니다. “중요한 자리에 누가 가장 적합한 사람인가?”  오늘날 대중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가, 경제관료, 교육정책 입안가 등 등, 이들 모두는 과연 적절한 자리에서 올바른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주 민감한 문제이지요. 그러한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질문일 테니까요?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미움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자신의 믿음을 두려움 없이 질문으로 던지는 소크라테스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부하고 굽신 대는 오늘의 행태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소크라테스가 되어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끝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나 자신을 찾고 알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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