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로망스; 사랑의 빛과 그림자

by 최용훈

중세의 기사는 단지 용맹한 전사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친절했고, 예의가 있었으며 관대하고 자신의 여인에게 헌신적이어야 했다. 이러한 품성들이 합쳐져 완전한 기사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중세의 기사는 말을 타고 창과 칼로 전투에 임했던 전사로 시작되었지만, 12세기 중세 로망스(Romance) 문학이 꽃피기 시작하면서 궁정에서의 사랑과 이상적인 기사들의 새로운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특히 노르망디 출신의 시인 와스(Robert Wace, 1100~1170?)의 ‘브륏 이야기’(Le Roman de Brut, 1155)에서는 전설의 왕 아서(Arthur)와 그의 원탁의 기사들이 처음 등장함으로써 중세 기사들의 전형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중세의 로망스 문학은 기사들의 용맹과 충성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가 중심 되는 주제를 형성하게 된다.

전장으로 나가는 중세의 기사

로망스는 사랑과 영웅적인 행위를 산문이나 운문으로 기술한 문학의 한 종류였다. 이야기는 먼 과거나 알 수 없는 장소, 즉 현실의 일상과는 다른 초자연적인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다. 유럽에서 시작된 로망스는 영국에서는 노르만 정복(1066) 이후부터 맬러리 경(Sir Thomas Malory)의 장편 로망스 ‘아서의 죽음’(Morte de’Arthur, 1470)이 발표된 15세기 후반까지 대표적인 문학의 장르를 형성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대대적인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고, 라틴어는 성직자와 법률가들의 언어로, 프랑스어는 상류 계층의 언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시절 유럽의 로망스가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 섬에 유입되었던 것이다.


로망스라는 표현은 프랑스어 로만즈(romanz)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어휘는 원래 라틴어 계열의 언어(로망스어: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갈어 등)들로 써진 문학작품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후 남녀 간의 사랑과 기사들에 관한 작품들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로망스 작가들은 아서 왕이나 샤를마뉴 대제와 같은 위대한 왕이나 기사들을 소재로 삼았고 그 인물들을 신화나 허구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아서, 새로운 샤를마뉴를 창조하였다. 그러한 로망스는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당대의 가장 인기 있는 문학의 유형이 되었다. 16세기 이태리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1547~1616)의 ‘돈키호테’(Don Quixote, 1605)의 주인공 돈키호테는 작품 속에서 로망스의 열렬한 독자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로망스는 긴 이야기 속에 여러 가지 사건, 모험과 전투 그리고 영웅적 행위들을 담고 있다. 서술 방식과 시간적, 장소적 배경은 모호했고, 인물들에 대한 세부적 묘사는 거의 없었다. 주인공들은 선하거나 악한 기사들로 전형화(stereotyped) 되었으며, 등장하는 여성들은 언제나 아름다웠고 사랑에 빠져있었다. 문체는 단순하고 직접적이었지만 재치와 유머러스한 표현들로 가득했다. 프랑스의 로망스는 샤를마뉴와 그의 열 두 기사들의 이야기였고, 이태리의 로망스는 고전적, 신화적 영웅들의 이야기였으며, 영국의 로망스는 아서와 그의 기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영국의 로망스 작품들 중 가장 알려진 것은 작자미상의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그리고 앞서 언급된 ‘아서왕의 죽음’이었다.


위대한 전사이기도 하였던 헨리 2세(Henry II, 재위 1154~1189)와 그의 뒤를 이은 사자왕 리처드 1세(Richard the Lionheart, 재위 1189~1199)의 통치 기간 중에 12세기 여류시인 마리 드 프랑스(Marie de France, 1160~1215)는 그녀의 담시(譚詩, Lays: 12편의 짧은 운문의 로망스)들에서 기사와 여인들 사이의 감동적이고 마법과도 같은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묘사하였다. 한편 궁정의 성직자였던 안드레아(Andreas the Chaplain)는 프랑스의 자치지구인 아키텐의 여공작 알리에노르(Queen Eleanor of Aquitaine)와 루이 7세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이자 이후 샴페인 백작의 부인이 된 메리(Marie de Champagne)를 위해 쓴 풍자적인 글 ‘정직한 사랑의 기술’(The Art of Honest Loving, 1185)에서 사랑은 귀족적인 삶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중세의 궁정에서는 기사와 귀족 부인이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흔했고 이들의 사랑은 대부분 정신적인 사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혹자는 귀족들이 이러한 관계를 방임하였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젊은 기사들이 궁정의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전투에서 용맹을 떨치게 하려는 지배계급의 책략이었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다. “라는 경구가 퍼져있었고 이런 의미에서 기사와 귀족의 부인들의 사랑은 당시의 사랑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위대한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무용을 발휘하는 것 외에도 시와 음악을 즐기는 고상한 궁정인이 되어야 했고, 미묘한 사랑의 게임을 할 줄 알아야 했던 것이다

기사와 연인의 애달픈 이별

맬러리의 ‘아서왕의 죽음’에서도 사랑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사들은 자신들의 여인을 위해 전장으로 떠났고, 승리를 통해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다. 전투에서의 승리는 또한 사랑하는 여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충실했고 그녀를 위해서는 어떤 불가능한 일에도 도전했으며, 설사 버림을 받거나 모함을 당하더라도 기꺼이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지점에서 비극이 잉태된다. 귀네비어(Guinevere)에 대한 란슬롯(Lancelot)의 사랑은 결코 해피엔딩으로 귀결될 수 없었다. 그녀는 란슬롯이 모시는 아서왕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로망스 속에 묘사된 비극적 사랑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즉 행복한 결합으로 충족되지 못하고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적인 사랑이었던 것이다. 란슬롯의 귀네비어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헌신으로 결국 아서왕의 궁정은 파멸을 맞는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소문과 비방들로 인해 아서왕은 자신의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였던 란슬롯을 향해 무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전설은 막을 내린다.


연인들의 비극은 중세에 만들어진 공식이었고, 이는 시대를 초월해 문학 속에 반복되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 란슬롯과 귀네비어,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이들은 모두 불가능한 사랑으로 비극적 운명을 맞이했던 연인들이었다. 왜 문학 속에서의 사랑은 죽음과 연결되는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모든 사랑은 언젠가는 헤어지거나 죽음으로써 끝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즉 냉담과 배신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으로써 종말을 맞이해야 했던 것이다. 14세기 영국의 작가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2~1400)의 시 ‘공작부인의 책’(The Book of Suchess, 1369)에는 8년 간 불면증에 시달려온 시 속의 화자(話者)가 마침내 잠이 들어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떤 숲으로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검은 기사’(Black Knight)를 만나 그의 궁정생활과 사랑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자신의 여인이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했는지 그리고 함께 하는 동안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말한다. 꿈에서 깰 무렵 화자는 검은 기사가 자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의 여인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중세의 문학이 사랑을 비극적으로만 묘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궁정에서의 사랑이 모두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귀족끼리의 결혼은 모두 집안 사이의 중매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에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있던 교회는 혼인 성사는 부부가 될 두 사람 사이의 완전한 동의하에서만 유효한 것이라 규정하고 있었다. 중세의 문학 속에서 연인들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신분은 미덕과 상대에 대한 충실성과 결합하여 사랑을 이룬다. 이러한 문학 속의 사랑은 결혼의 현실을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귀족 사이의 결혼을 미화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문학은 이상화된 사랑의 모습을 제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완벽한 형태로 경배함으로써 연인들로 하여금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 완전함을 이룰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 드 프랑스의 짧은 로망스 ‘기즈마’(Guigemar)에는 한 현명한 시녀가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위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밤새 잠들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목소리와 모습, 그 맑은 눈과 아름다운 입술을 떠올리며 상심과 한숨 속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시녀가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 사랑에 빠지셨군요. 굳이 그 마음을 감추려 하지 마세요! 그 여인을 소중히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세요. 여인을 사랑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녀를 높이 평가해야 한답니다. 서로에게 충실하다면 그 사랑은 찬양받게 될 거예요. 주인님은 멋지시고 그녀는 아름다우니까요.”


중세의 로망스는 기사들의 사랑이 때론 행복하게, 때론 슬프게 묘사되고 있다. ‘로맨스’라는 현대의 영어 단어가 ‘낭만’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로망스에서 묘사되는 기사들의 미덕---용맹, 충성, 자제심, 신앙, 명예, 순결 등은 중세 사람들에게는 삶의 근본적인 지침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중세 문학 속의 사랑은 비극적인 결말을 맺기도 하지만, 사랑을 숭고한 아름다움과 믿음으로 경배하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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