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국민 작가로 추앙되는 제프리 초서(GeoffreyChaucer, 1340~1400)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100년 전쟁’의 기간에 생애를 보냈다. 노르만 정복 이래로 주권을 잃고 프랑스의 지배 하에서 영국의 왕이 프랑스 왕에 의해 지명되는 치욕의 세월을 보낸 후 앵글로색슨족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였고, 그에 따라 고취된 애국심으로 한 세기에 걸친 프랑스와의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또한 14세기 후반, 인류 최대의 재앙인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어 유럽 인구의 최소 1/3이 사망하게 되는데 섬나라 영국도 그 비극적인 재난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그 전쟁과 역병의 와중에서 영국은 프랑스어가 아닌 모국어로 써진 문학을 만나게 되었고, 그 주인공이 바로 제프리 초서였다. 물론 그가 영어로 작품을 쓴 최초의 작가는 아니었다. 그 자신도 작가로서 생애의 첫 2/3를 프랑스와 이태리의 영향을 받았으나 마지막 15년 동안 척박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도 영어로 된 문학작품들을 내놓아 오랜동안 끊겨왔던 앵글로색슨 문학의 맥을 새롭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초서의 대표작이 바로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1387~1400)이다. 캔터베리는 영국의 동남쪽 끝자리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이곳에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t) 성인을 모신 캔터베리 대성당이 위치하고 있어 그곳은 영국 각지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였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생명이 움트는 4월의 어느 날 순례자들이 런던의 템즈(Thames) 강 건너편 사우쓰와크(Southwark)에 있는 타바드 인(Tabard Inn)이라는 작은 여인숙에 모임으로써 시작된다. 당시 순례의 여행길은 험하고 강도도 많아 홀로 여행하기는 불가능했기에 순례자들은 이곳에 모여 함께 순례를 떠나곤 했다. 마침내 29명의 순례자가 모이자 여인숙의 주인이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무료한 여행길의 재미로 오고 가는 길에 순례자 각자 두 가지씩의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 대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이로써 초서는 왕복의 길에 모두 116편의 이야기를 계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써가는 도중 1400년에 세상을 떠남으로써 초서는 원래의 계획과는 달리 작품의 프롤로그와 함께 총 24편의 이야기만을 완성할 수 있었다. 1387년부터 시작해 1400년까지 13년에 걸친 집필의 결과가 ‘캔터베리 이야기’였던 것이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순례를 모티브로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영국 사회의 모든 계층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기사, 수녀원장, 수도사, 상인, 법률가, 자유 농민(귀족이 아닌 토지 보유자), 신학생, 방앗간 주인, 하급 지방관리, 면죄부를 파는 설교자, 음탕한 아낙네, 지방의 대지주 등 다양한 군상들을 등장시켜 중세 영국의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렇듯 다채로운 배경의 인물들이 참여한 이야기 대회를 통해 초서는 다양한 종류의 글들을 창작할 수 있었다. 종교적 전설, 궁정 연애, 익살스러운 운문(韻文)의 이야기(fabliau), 성자의 삶, 교훈적 의미를 함축한 도덕적 이야기(allegorical tales), 동물 우화(beast fable), 중세의 설교(medieval sermons), 연금술 이야기(alchemical account) 등 다양한 문체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순례는 종교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세속적으로는 봄철의 여행 같은 면도 있었기 때문에 초서는 이를 통해 현세의 쾌락과 악행 그리고 사후의 정신세계 사이의 관련성을 광범위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캔터베리 이야기’ 중 잘 알려진 여섯 개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수녀원 사제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일종의 동물 우화에 속하는 것으로 프랑스나 독일 문학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여우 레이나드’(Raynard the Fox)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 (우리말로 ‘여우 이야기’로 번역되는 이 작품은 이솝우화, 고대 로마의 이센그리무스, 인도의 판차탄트라 등과 같은 동물 우화 중의 하나이다.)
의사(疑似) 영웅체로 써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8마리의 암탉을 거느리고 있는 챈티클리어(Chanticleer)라는 수탉이다. 그의 첫째 부인인 암탉 퍼티롯(Pertelote)은 남편의 불길한 꿈을 무시하고 그를 일터로 내보낸다. 그가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우 한 마리가 그에게 접근하여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멋진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는지를 상기시키며 아첨하듯 그를 치켜세운다. 우쭐해진 수탉은 여우의 꼬임에 빠져 눈을 감고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른다. 그러자 여우는 재빨리 수탉을 낚아채 달아난다. 그 모습을 본 수탉의 주인과 마당의 동물들이 그 뒤를 쫓는다. 여우의 입에 물려가던 수탉은 여우에게 따라오던 동물들에게 돌아가라고 외쳐달라고 간청한다. 그 말을 들은 여우가 소리를 치기 위해 입을 벌리는 순간 수탉은 자유로워져 위험에서 벗어난다. 이야기는 ‘아첨’에 대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수녀원장의 이야기
중세 기독교도들에게 널리 알려진 반유대적 전설에 기초한 이 이야기에서 수녀원 원장은 한 과부의 신앙심 깊은 어린 아들이 유대인들에 의해 납치된 사건에 대해 말한다. 그 유대인들은 아이가 더 이상 동정녀 마리아에게 바치는 성가 ‘오 구세주의 어머니’(O Alma redemptoris)를 부르지 못하도록 하라는 사탄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납치자 중 하나가 소년의 목을 자르고 시신을 하수구에 던진다. 그러나 기적과도 같이 아이는 계속해 찬송을 부를 수 있었고 그의 어머니와 기독교인들은 그를 찾을 수 있었다. 판사는 유대인 범인들에게 사형을 명한다. 목을 잘린 아이는 죽어가면서도 마리아가 자신에게 노래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었음을 말한다.
기사의 이야기
로망스 형태의 기사 이야기는 14세기 이태리 작가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서사시 ‘테세이다’(Teseida)에서 유래한다. 이 기사 이야기는 ‘캔터베리 이야기’의 일부로 창작된 것은 아니고 작품 중 기사의 성격에 맞추어 초서가 보카치오의 작품을 각색한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테베의 기사들인 팔라몬(Palamon)과 아르시테(Arcite)는 사촌 사이로 전쟁에서 패배하여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Theseus)의 포로가 된다. 감옥에 갇혀있던 그들은 어느 날 작은 창문을 통해 테세우스의 처제인 에멜라이(Emelye)를 보게 되고 동시에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옥에 갇힌 그들이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아르시테를 잘 알던 테세우스의 지인이 그의 석방을 간청하고 테세우스는 아테네를 떠나는 조건으로 아르시테를 풀어준다. 하지만 테베로 돌아온 후에도 아르시테는 에멜라이를 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변장을 하고 다시 아테네로 향한다. 숲 속을 헤매던 그는 같은 시기 감옥을 탈출하여 숲으로 숨어든 팔라몬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에멜라이를 놓고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그때 숲으로 사냥을 나왔던 테세우스가 두 사람을 발견하고 격분하여 죽이려 하나 왕비와 처제인 에멜라이가 그들의 순수하고 열렬한 사랑에 감동하여 살려줄 것을 간청한다. 두 사람의 간절한 사랑을 알게 된 테세우스는 둘 사이의 정당한 대결을 주선한다. 사랑을 놓고 벌인 두 사람의 싸움에서 아르시테가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아르시테에게 반한 여신 비너스가 그의 승리에 실망하여, 농경의 신인 새턴에게 부탁해 세상의 땅을 흔들어 놓는다. 그러자 아르시테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 뛰어오르고 땅에 떨어진 그는 사나운 말에 밟혀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죽어가는 아르시테는 슬퍼하는 에밀라이에게 자신의 친구이자 사촌인 팔로몬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팔라몬이 “진실과 명예, 지혜와 겸손함”을 지닌 진정한 기사라고 찬양한다. 아르시테에 대한 긴 애도의 기간을 마치고 에밀라이는 팔라몬과 축복 속에 결혼한다. 로망스의 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여인에 대한 진솔한 사랑과 함께 기사의 미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스의 아낙네 이야기
이 이야기는 독신주의에 대한 비난과 다섯 번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음탕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프롤로그를 바스의 아낙이 떠들어대면서 시작된다. 이 프롤로그로 인해 바스 아낙네의 이야기는 '캔터베리 이야기' 가운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다. 이야기에는 강간 혐의로 잡힌 한 기사가 등장하는데, 그는 일 년 이내에 세상 여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알아낸다면 처형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던 중 추하기 짝이 없는 한 늙은 마녀가 그에게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그에게 그 답을 알려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녀가 알려준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것은 ‘남성에 대한 지배권(maistrie)’이었다. 그의 답이 법정에서 받아들여져 그가 목숨을 구하게 되자 마녀는 그에게 자신과 결혼하자고 요구한다. 결혼식 첫날밤 마녀가 그에게 묻는다. “못났지만 충실한 아내와 예쁘지만 충실치 못한 아내 중에 어느 편이 좋은가요?” 그러자 그는 “그것은 당신 결정에 달렸지요.”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의 지배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고, 그러자 마녀는 주술에서 풀려 원래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부부로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 바스의 아낙네 이야기는 아서왕의 로망스 중 ‘가웨인 경과 레그넬 부인의 결혼’(The Wedding of Sir Gawain and Dame Regnell)에 기반하고 있으며 14세기 영국 작가 존 가워(John Gower)가 쓴 장시(長詩) ‘연인의 고백’(Confessio Amantis) 속 이야기와 유사하다. 중세의 여성들 모습과 함께 그들의 역할을 호방한 여인의 이야기로 묘사하고 있다.
대지주의 이야기
지방의 대지주인 화자는 네 가지 마법의 선물을 얻은 캄부스칸(Cambuscan)의 왕 타타르(Tartar)dp 관한 미완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네 가지 선물은 놀라운 속도로 어느 곳이든 안전하게 날아가는 청동의 말, 갑옷을 뚫으면서도 다친 상처를 치료하는 칼, 닥쳐올 위험을 얘언하는 거울, 그리고 새들의 말을 이해하고, 모든 식물의 치유력을 알게 해주는 반지였다.
면죄부 파는 설교자의 이야기
냉소적인 설교자가 재치가 넘치는 프롤로그를 통해 자신이 죄를 용서하는 면죄부를 팔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는 또한 자신이 탐욕을 멀리하라는 설교를 하지만 실제로 자신은 그것에 빠져있음을 인정한다. 얘기 속에서 세 명의 술꾼들은 한 친구의 죽음을 보고 ‘죽음’을 퇴치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길을 떠난다. 가는 도중 한 노인이 그들에게 죽음은 숲 속의 어떤 떡갈나무 아래에 있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그들이 그 나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한 더미의 금화가 놓여있었다. 금화를 본 세 사람 중 둘이 더 많은 금화를 차지하기 위해 다른 한 친구를 죽이기로 공모한다. 하지만 친구를 죽이고 술병을 들이켜는 순간 그 병에는 이미 죽은 친구가 사전에 풀어놓은 독이 들어있었다. 결국 남은 두 친구도 죽고 만다. 설교자는 탐욕, 도박, 신성모독을 경계하는 그럴싸한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뒤 자신은 설교를 듣는 사람을 위해 죄 사함을 구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더없이 행복하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