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르네상스는 대체로 14세기 후반 이태리에서 시작되었다. 13세기에서 17세기까지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메디치 가문은 이태리 르네상스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가문은 네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였고, 유럽 최대의 은행인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였다. 특히 피렌체의 통치자였던 로렌초 데 메데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르네상스 예술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이렇듯 이태리에서 발화된 르네상스가 영국에서는 16세기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도입되어 17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은 유럽에서 시작된 예술, 문화적 흐름이 보통 한 두 세기 늦게 시작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유럽 대륙과 섬나라 영국을 갈라놓은 도버해협 때문이었다. 이 해협은 앵글로색슨 시대의 시작부터(5세기 말) 노르만 정복(1066)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에 걸쳐 외세의 침략을 막는 역할을 하여 영국인만의 독특한 개성과 정체성이 성립되는 이유가 되었다. 반면에 해상을 통한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짐으로써 영국의 국력을 향상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의 배타성과 해협으로 분리된 지리상의 이유로 하여 유럽 대륙으로부터의 문화 전파가 비교적 늦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영문학의 역사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와 자코비안 시대는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 즉위해 1603년 사망할 때까지 거의 반세기에 걸친 통치 기간 중 영국이 유럽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후사 없이 사망한 여왕의 뒤를 이어 그녀의 먼 친척이며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 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새로운 왕이 통치했던 1603년부터 1625년까지를 자코비안(Jacobean) 시대라 부른다. 이 엘리자베스와 자코비안 시대는 영국 르네상스의 절정을 이루며 특출한 문학가들을 대거 배출하게 된다.
영국의 르네상스는 비록 유럽에 비해 늦어졌으나 놀라우리만치 빛나는 문학의 발전을 초래하였다. 하지만 당시 영국사회는 모든 면에서 대대적인 변혁을 겪고 있었다. 영국의 인구는 르네상스 이전에 비해 두 배나 증가되었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시민들의 사회적 충성심은 약화되었다. 변화된 산업 환경속에서 1620년대 실질 임금은 사상 최하를 기록했으며 새로이 부상한 상인 계급이 귀족과 노동자들의 희생 속에 번창하였다. 이러한 사회 계층의 변화는 문학과 연극 속에서 비난과 풍자의 대상으로 드러난다. 한편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목가적인 전원시가 유행했는데 이는 울타리를 치고 양을 키우던 농부들의 번영과 무관하지 않았다. 군주들은 정치적으로는 지배적 지위를 누렸으나 재정적으로는 취약해 언제나 잠재적 불안정 속에 빠져있었다. 1640년 찰스 1세는 신하들의 신망을 잃고 결국 청교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단두대에 처형되고 만다. 반면 토마스 하만(Thomas Harman, 1566)과 로버트 그린(Thomas Greene) 이 쓴 정치 평론이나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희곡 리어 왕(King Lear, 1591~1592) 등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비참한 현실과 어려움이 묘사되었다. 이렇듯 빈부의 격심한 차이와 정치적 불안정은 영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르네상스의 도입은 이전의 세계관에 대한 불신과 새로운 가치관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미래의 변화에 대한 의심은 문학과 예술에 강렬한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사회적 격동과 더불어 지적인 측면에서도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종교의 절대성에 기댄 중세의 경직성은 새로운 학문과 종교 그리고 르네상스의 휴머니즘 앞에서 붕괴되고 말았다. 한편 천문학자들과 탐험가들의 발견으로 인해 우주에 대한 기존의 관념 역시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16세기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였고, 이는 이태리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통한 관측으로 입증되었다. 신과 신이 만든 우주 속에서 지구를 중심으로 삼고 있던 중세의 사상이 무너짐으로써 기존의 세계관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십자군 전쟁과 해양으로의 진출을 통한 동서양의 만남, 전쟁과 흑사병에 의한 봉건제의 몰락, 종교혁명을 통한 로마 교황청 중심의 구교(Old Church-Roman Caltholic)에 대한 도전 등으로 르네상스 시대는 모든 것은 변화할 수 있다는 '변화의 가능성'(mutability)을 사람들의 인식 속에 심어놓았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영시와 산문은 1570년대에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에드워드 스펜서(Edward Spenser, 1552/1553~1599)와 필립 시드니(Philip Sidney, 1554~1586)가 정교하고 유려한 문체를 제시한 이래 1590년대와 1600년대의 20년 간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들에 의해 놀라운 작품들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발전의 토대는 1550년부터 놓이기 시작했다. 영어의 문학적 표현 능력에 대한 확신, 교육의 대대적인 확산 등이 처음으로 문학적, 예술적 취향을 지닌 독자층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또한 엘리자베스 시대 인쇄술의 발전도 문학의 생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출판물 전담기구인 ‘스테이셔너 컴퍼니’(Stationers’ Company)가 1557년에 설립되었으며, 리처드 토텔(Richard Tottel)이 1557년 출판한 영국 최초의 인쇄된 시문집 ‘미셀러니’(Miscellany)는 궁정에서나 볼 수 있던 서정시들을 대중에게 전파함으로써 시인과 독자들 사이의 관계를 혁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펜서와 시드니는 인쇄술을 이용해 자신의 재능을 대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던 최초의 시인들이었다. 이들의 시와 소네트들은 새로운 문체와 시적 아름다움으로 대중들의 문학적 취향을 풍요롭게 하였다.
서정시와 소네트가 이 시대의 대표적인 운문들이었지만 이와는 구분되는 문학적 실험들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실험들은 시의 장식적 요소들을 거부하고 문학의 다른 용도들을 지향하였다. ‘기만적인 소네트’(Gulling Sonnet, 1594)를 쓴 존 데이비스 경(Sir John Davies)과 예수교 시인인 로버트 사우쓰웰(Robert Southwell) 등은 스펜서나 시드니의 소네트와 서정시들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실험에 자극을 준 것은 이국적인 문학의 번역본들이었다. 리처드 스태니허스트(Richard Stanyhurst)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d)를 번역하였고, 존 하링턴(John Haringon)은 르네상스 시대 이태리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토스(Arioto)의 장편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Orlando furioso, 1591)를 영어로 옮겼다. 또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천재 희곡작가인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는 10권으로 이루어진 로마 시인 루칸(Lucan)의 서사시 중 첫 권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로마의 스토리텔링과 유럽의 르네상스 작품들은 영문학에 새로운 문체와 분위기를 가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번역문학은 에필리온(epyllion)이라 불리는 짧은 서사시의 형식을 탄생시키기도 하였다. 운문체로 된 이 글들은 주로 신화적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로마제국의 첫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단편 서사시 형식은 그리스 신화를 다룬 말로우의 시 ‘헤로와 레안더’(Hero and Leander), 셰익스피어의 시 비너스와 아도니스(Venus and Adonis) 등에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정점은 연극이었다. 사실 이 시대의 삶은 지극히 연극적이었다. 화려한 왕의 행렬, 의상을 통한 계급과 신분의 엄격한 구분 등은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이러한 모습을 무대 위에 재현함으로써 대중들은 현실이 아닌 연극적 환상 속에서 신분과 역할의 전복(顚覆)을 경험할 수 있었다. 값싼 관람료로 극장들은 귀족들 뿐 아니라 노동자, 도제, 창녀, 소매치기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 넘쳐났고, 낮에 대중들이 보고 즐기던 연극들은 밤에는 궁정에서 공연되었다. 연극은 이러한 관객들의 다양한 감성과 복잡한 사회적, 문화적 관점들을 충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런던의 극장들은 휴머니즘과 대중의 기호가 만나는 지점이 되었다. 당시의 관객들은 궁정과 대학들에서 이루어지던 휴머니즘 연극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이 전통은 그리스-로마 고전극의 부흥으로 이어지고 로마의 연극적 기법을 채택하여 비극에 합창과 유령, 형식적 시어 등이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연극들은 로마 극작가 세네카의 전례를 따라 희곡을 5막으로 구성하기도 하였다.
르네상스는 중세와 근대를 잇는 전환의 가교였다. 이 시기는 또한 종교, 경제, 사회, 예술 분야에 획기적인 전기가 이루어졌다. 영국의 르네상스는 늦은 시기에 개화하였지만 대부분의 유럽적 전통의 수용에서와 마찬가지로 짧은 시간 안에 르네상스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예술의 암흑기인 신 중심 중세의 흔적을 털어내고 인본주의적 예술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특히 영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르네상스의 셰익스피어는 이후 영문학의 발전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