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밀턴, 기독교적 휴머니즘 & 빛의 상실

by 최용훈

영문학에서 셰익스피어 이후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은 독자들에게는 ‘실낙원’(Paradise Lost, 1667)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성서에 기초한 이 서사시는 ‘복낙원’(Paradise Regained), ‘투사 삼손’(Samson Agonistes)과 더불어 밀턴을 위대한 영국 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한편 그의 산문들에서 밀턴은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의 폐지와 찰스 1세의 처형을 옹호한 강경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1642년의 청교도 혁명에서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이후에까지 밀턴은 전제군주제와 종교의 국가 주도에 반대하는 정치 철학을 주창하였다. 그의 영향력은 영국의 청교도 혁명기(1642-1652) 뿐 아니라 미국의 독립혁명(1765-1791)과 프랑스혁명(1789-1799)에도 이어졌다. 신학적 관점의 글에서는 양심의 자유, 신앙에 있어 성서의 중요성, 반대자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 등을 주장하였다.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청교도 공화국 시절(1649-1660)에는 정부 관리로서 타국과의 서신 교류를 책임져 청교도 공화국에 대한 외국의 비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도 하였다.


휴머니즘(Humanism)은 인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면서 수 세기에 걸쳐 형성된 사상이다. 일반적으로 휴머니즘은 몇 가지 관점들로 규정된다. 첫째, 휴머니즘은 그리스-로마 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뭉쳐진 교육받은 사람들이 주도한 운동으로 주로 이태리의 르네상스 기간에 형성된다. 둘째, 휴머니즘은 철학적 이념의 한 형태로서 그 사상의 중심에는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있었다. 인간은 목적과 열망, 능력과 특정 성향을 지닌 존재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는 신 중심의 중세적 시각에서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것이었다. 셋째, 휴머니즘은 인류애(humanity)를 인간에 대한 태도의 기본 원리로 삼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은 중세의 종교적 이념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여러 측면에서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기도 하다. 고대의 정신이나 기독교 모두 인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휴머니즘은 계몽되지 않고, 도덕적으로 양육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았고 인간의 개선을 위해 도덕적, 사회적 이상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애와 정의의 개념은 고대로부터 발전되어 온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휴머니즘은 르네상스와 연결된다. 그런 고로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 특히 17세기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휴머니즘의 개념을 담고 있었다. 르네상스와 고전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존 밀턴도 그러한 작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그는 열렬한 청교도 작가였으며 17세기의 가장 종교적인 시인이었다. 그의 ‘실낙원’은 신에게 도전한 사탄과, 신의 뜻을 거스른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이며 특히 인간과 신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다분히 성서의 이야기에 입각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의 독자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탄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기도 한다.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나선 사탄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휴머니즘에서 얘기하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존 밀턴은 청교도로서 깊은 종교적 신앙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르네상스의 휴머니즘 사상을 함께 표현하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기독교적 휴머니즘’(Christian Humanism)의 작가라 불리기도 한다.

밀턴은 녹내장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수년간에 걸쳐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1652년 그는 결국 완전히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맹인용 점자책을 발명한 브라유(Louis Braille, 1809~1852) 이전만 해도 시력의 상실은 지적인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밀턴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문학에의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맹인이 된 후에도 그는 딸에게 서신이나 시사적인 글들을 읽게 하고 자신의 느낌을 설명하는 시를 썼던 것이다. 다음에서 시력을 잃은 후의 감정과 결의를 적은 밀턴의 소네트 19번을 소개한다.


이 어둡고 광활한 세상에서 삶의 절반도 살기 전에

내 눈에 빛이 소멸됨을 생각하니,

감춰두면 시들어버릴 한 가지 능력이

쓸모없이 내 안에 남아있을 뿐.

내 영혼은 그것으로 창조주를 섬기고

돌아와 나를 꾸짖으심을 면하기 위해

나의 진솔한 기록을 드리고 싶어 하지만, 나는 어리석게 묻는다.

“신이여 빛을 빼앗으시고도 제가 일하길 원하십니까?”

하지만 인내(忍耐)가 그 중얼거림을 막고 대답한다.

“신은 인간의 일도, 재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의 가벼운 멍에를 가장 잘 지는 자가 가장 잘 섬기는 자이다.

그의 나라는 왕국이니, 수천의 천사가 그의 명에 따라

쉼 없이 땅과 바다를 넘어 달리고 전하노라.

그러니 그저 서서 기다리는 자들 또한 섬기는 자이다. “


When I consider how my light is spent

Ere half my days in this dark world and wide,

And that one talent which is death to hide

Lodg'd with me useless, though my soul more bent

To serve therewith my Maker, and present

My true account, lest he returning chide,

"Doth God exact day-labour, light denied?"

I fondly ask. But Patience, to prevent

That murmur, soon replies: "God doth not need

Either man's work or his own gifts: who best

Bear his mild yoke, they serve him best. His state

Is kingly; thousands at his bidding speed

And post o'er land and ocean without rest:

They also serve who only stand and wait. “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청각장애자가 된 후에도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다. 자신의 예술을 위해 가장 중요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가. 밀턴은 48세의 나이에 맹인이 되었다. 작가로서의 능력은 위협을 받았고 그 결과 그는 신의 뜻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그의 소네트 19번에서 밀턴은 시력을 잃은 뒤 신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감춰두면 시들어버릴 한 가지 능력”을 낭비하는 것 같아 불안하다. 그 능력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성경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인데, 그 속의 두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야기 속에서는 달란트, 즉 돈을 의미한다)을 투자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여 벌을 받는다. 밀턴은 신이 그에게 능력을 감추지 말고 그것을 사용해 찬양의 시를 쓰기를 원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밀턴은 시력을 잃어 원하는 대로 신을 섬길 수 없음을 한탄한다. 소네트에 표현된 “진솔한 기록”은 그의 종교시를 나타낸다. 밀턴이 쓴 대부분의 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며 그는 신의 뜻을 더욱 명료하게 하여 그를 경외하는 것이 그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밀턴은 볼 수 없는 몸으로 자신이 계속 글을 쓰는 것이 신의 바람일지를 의심한다. “신이여 빛을 빼앗으시고도 제가 일하길 원하십니까?” 그리고 ‘인내’의 말을 통해 신은 그에게서 이룰 수 없는 것을 원치 않으심을 알게 되고, 그런 이유로 죄를 묻지 않으실 것을 알게 된다.


시의 후반은 좀 더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진다. 사람들은 모두 제 각기의 방법으로 신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신의 은총이라는 점이다. “그의 가벼운 멍에를 가장 잘 지는 자가 가장 잘 섬기는 자이다.” 마지막 줄에서 밀턴은 한 때 흔들렸던 신앙의 회복을 묘사한다. “그저 서서 기다리는” 것도 섬김임을 믿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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