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킬로스(Aeschylus, 525~455 BC)는 70~90여 편의 비극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중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일곱 편뿐이다. 그는 종종 비극의 아버지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스 연극에서 아이스킬로스가 이루어낸 가장 큰 혁신은 제2의 배우를 도입한 것이다. 이로써 두 배우 간의 얼굴을 맞댄 갈등의 장면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래에 소개한 세 작품과 더불어 ‘결박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Bound)가 있다.
1. 아가멤논(Agamemnon)
‘아가멤논’은 그리스인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아케이아 인들의 왕 아가멤논이 아르고스의 궁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트로이를 점령해 불태우고 개선하는 길이었다. 한편 그의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들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위한 복수를 계획한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출정 전에 동에서 서로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딸을 바다의 제물로 바친다. 바람은 여신 아르테미스에 의해 아케이아 해군의 항해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가멤논이출정을 떠나자 아르고스의 장로(長老)들 역을 맡은 코러스가 트로이 정복 이후 벌어질 파괴와 살육, 그리고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아가멤논의 잔인성과 관련된다. 즉 딸을 죽일 수 있는 그가 벌이는 트로이에서의 잔인한 살육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바람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바람의 방향을 바꾸어 트로이 원정을 가능케 하였지만 전쟁 이전부터 이피게네이아의 희생과 아가멤논의 잔인성을 증오하고 있었다.
트로이를 함락하고 아르고스로 돌아온 아가멤논은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 의해 살해된다. 또한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데려온 트로이의 카산드라 공주 역시 살해당한다. 그녀의 죽음은 극 중 가장 통렬한 부분을 이룬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카산드라는 궁으로 들어가 왕비에 의해 살해된다.
2. 제주(祭酒)를 나르는 여인들(Libation-Bearer)
‘제주를 나르는 여인들’(Libation-Bearers)은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에 낳은 또 다른 딸 엘렉트라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실에 대해 분노한다. 그녀가 자신의 언니인 이피게네이아가 아버지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실에도 분노했는지는 명확치 않다. 극의 시작 부분에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엘렉트라를 아버지의 장례식에 보낸다. 그녀는 아버지의 시신을 덮은 흙 위에 제주를 뿌리게 되어있었다. 엘렉트라는 어머니의 이러한 태도가 위선적이라 느끼며 시녀들로 이루어진 코러스에게 제주를 올리는 방식을 묻는다.
아버지의 무덤에서 엘렉트라는 그녀의 오빠 오레스테스를 만난다. 그 역시 아가멤논과 클리타임네스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와 함께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그들은 어머니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이 계획된 살인을 인간의 피로 만든 제주라고 묘사한다. 하지만 희생양의 피가 아니라 살해한 인간의 피로 제주를 바치는 것은 옳은 일은 아니었다. 결국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엘렉트라의 도움을 받은 오레스테스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죽인 아들로서의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복수의 여신들에게 둘러쌓인 오레스테스
3. 에우메니데스(Eumenides)
이 극의 이야기는 잔혹한 복수의 여신들 에리니에스가 자비로운 에우메니데스로 변화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에우메니데스는 ‘좋은 성품을 가진 자들’이란 뜻이다. ‘복수의 신’으로 등장하는 에리니에스는 살인에 대한 대가를 추구하는 분노가 여성으로 구체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극의 첫 부분에서 에리니에스는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에 대한 처벌을 다짐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인 아들에 대한 또 다른 복수가 이어지는 것이다.
에리니에스의 추적을 받던 오레스테스는 아테네 시로 도피한다. 그곳에서 아테네의 여신 아테나는 인류 최초의 재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재판에서 아폴로 신은 원고인 에리니에스의 주장과 반대로 오레스테스를 옹호한다. 남성 신이었던 아폴로는 모성보다는 부성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의 생식은 남성의 ‘씨앗’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에 상응하는 여성의 ‘씨앗’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어머니의 자궁은 아버지가 뿌린 씨앗을 받는 그릇일 뿐이었다. 이에 근거하여 과거 아테네에서는 아버지가 아테네 인인 경우 어머니가 그렇지 않더라도 아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극이 상연되었던 기원전 458년에는 달랐다. 새로운 법 아래서 시민권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아테네 사람일 경우에만 주어졌다. 이 새로운 법은 상류층 아테네 남성과 상류층 비 아테네 여성 사이의 결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남성(부성)과 여성(모성)을 동등하게 대하는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의 특징이기도 하였다. 아이스킬로스의 시대에 아테네는 보다 민주적 체제로 변화되고 있었다.
아테나 여신은 새로운 정치 현실의 완벽한 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성의 여신인 메티스의 자궁에서 잉태되었다. 모든 신의 으뜸인 제우스에 의한 임신이었다. 따라서 아테나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부모 사이에서 만들어진 유전적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은 제우스가 메티스의 임신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메티스 여신의 자궁에서 태어난 아들은 태어나면 아버지를 파괴하고 말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제우스는 임신한 여신을 삼켜버렸고, 결국 아테나는 메티스의 자궁이 아니라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아테나는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나게 된다. 섹스도 생식도 불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테나는 모성성과 부성성을 함께 지니고 있었으며 여성이며 동시에 남성이었다. 이러한 정체성이 인류 최초의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는 가부 동수였다. 하지만 아테나는 이 판결을 깨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에 대한 사형선고를 면하게 해 준다. 이는 오레스테스가 무죄임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에리니에스에 쫓기며 지옥의 고통을 겪은 오레스테스에게 더 이상의 처벌을 가하지 않았을 뿐이다. 평결을 들은 에리니에스가 피의 복수를 외치자 아테나가 새로운 질서의 문명에서 모든 죄와 처벌을 다룸에 있어 그들과 협력할 것을 제안하며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마침내 에리니에스와 아테나는 아테네에 대한 공동의 주권을 나누게 되고 피의 복수라는 원시적 정신은 문명화된 ‘도시국가’의 새로운 질서로 대체되는 것이다. 복수의 신은 더 이상 분노에 사로잡힌 에리니에스가 아니다. 그들은 부드럽고 자애로운 에우메니데스가 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 이름은 “좋은 성품을 가진 자‘를 나타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