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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an 04. 2022

페르소나, 그리스 연극의 가면

그리스 연극-2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는 가면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 가면을 그리스인들은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는데 이는 현대 영어의 ‘person’(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자신의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으로 그 의미를 확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부모, 부부, 형제, 친구, 교사, 학생, 고용인, 피고용인 등등. 이러한 역할을 위해서는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고 결국 각기 다른 가면을 써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독일의 심리학자 카를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페르소나’라는 용어를 한 인간의 ‘외적 인격’으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사용되었던 가면은 주로 등장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넓은 야외극장에 앉아있던 관객들은 멀리 떨어진 무대 위 배우들의 표정을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란 가면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무대 의상도 눈에 띄게 화려했고 배우들은 ‘온코스’(onkos)라고 불리는 머리장식을 쓰고 있었으며, ‘코토르노이’(kothornoi)라는 굽 놓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또한 여자가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여성 역을 하기 위해서는 성별을 나타내는 가면을 써야 했다. 즉 가면은 배우가 착용하는 의상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면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멜포메네’(Melpomene)는 신화 속 비극의 뮤즈였고, 다른 하나는 희극의 뮤즈인 ‘탈리아’(Thalia)였다. ‘멜포메네’는 ‘멜포’라고도 불리는데 그 의미는 ‘춤과 노래의 찬양’이었다. 비극의 가면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만 당시의 비극에서는 코러스에 의한 춤과 노래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적인 측면에서 전혀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탈리아’는 그리스 동사 ‘탈레인’(thallein)에서 나온 말로 ‘번창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멜포메네와 탈리아는 둘 다 제우스의 딸이었다.  


가면은 자주 디오니소스와 연관된다. 디오니소스는 ‘다산과 풍요’의 신이지만 ‘술’의 신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가면은 술이 가져다줄 수 있는 기쁘고 슬픈 감성 모두를 나타낸다. 가면은 또한 '시작'을 나타내는 두 얼굴의 신 야누스(Janus)와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영어의 1월이 재뉴어리(January)라고 불리는 것도 야누스와 무관하지 않다. 한 해의 시작이면서 지난 해와 새해를 모두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한 모양의 가면들이 제작되었지만 기쁨과 슬픔이라는 기본적인 감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희극에 사용되었던 가면들이 가장 뚜렷이 연극 가면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정확한 기원은 차치하고라도 가면은 오랜 세월에 걸쳐 연극이라는 예술의 얼굴이자 뿌리가 되어왔다.

그리스의 가면은 빳빳하게 채색된 리넨 천으로 되어있어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것이 없다. 다만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연극이 워낙 인기가 있어서 배우나 가면의 모형들이 테라코타나 돌, 청동으로 만들어지고 보석이나 그림, 모자이크 등에 새겨져 있어서 그 모습이 어땠는지는 알 수 있다. 옆의 사진 속 기괴하고 과장된 모습의 테라코타 모형은 기원전 3세기 와 그 이후 희극 속에서 노인 역의 배우가 쓴 것이었다. 커다란 미소와 주름진 이마, 대머리에 아이비 잎과 베리류의 열매로 엮어진 화관을 쓰고 있다. 반면 비극 속에 사용된 가면은 차분하고 진지하며 때로 고뇌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연극 가면은 실용적인 기능을 하였다. 그 독특한 모습은 멀리서도 배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여자 역을 포함해 한 가지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면은 배우의 목소리를 증폭시켜 객석 뒤쪽까지 들릴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기능 외에도 가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역시 ‘변형’(transformation)이었다. 서민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넘어서 신화 속의 영웅, 탐욕스러운 새터(satyr: 디오니소스의 말썽꾸러기 하인), 어리석은 노인이나 아름다운 여성, 심지어 신이나 노예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일상에서는 불가능했던 말과 행동을 무대 위 배우들을 통해 할 수 있었고, 무섭고, 우스꽝스럽고, 진취적이며 환상적인 모든 일과 생각을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연극의 대다수는 디오니소스에 대한 숭배를 담고 있다. 따라서 변형의 힘은 디오니소스 자신의 변화와도 관계가 있었다. 포도가 와인이 되고, 맨 정신이었다가 취하고, 인간이 동물이 되고, 질서가 혼돈이 되는 변화, 디오니소스는 언제나 변화 가능한 신이었던 것이다. 모든 그리스의 연극은 아테네에서 시작되고 그곳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아테네에서는 매년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축제가 열렸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시티 디오니시아’(City Dionysia)였다. 매년 3월에 열려 5-6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3부작으로 된 비극 세 편이 공연되었고, 새터극과 다섯 편의 희극이 이어졌다. 이 공연의 입장료는 일반 시민들을 위해 국가나 부자들이 부담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문화는 다분히 경쟁적이어서 축제는 경연대회의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승리한 희곡작가와 배우들에게는 커다란 특권이 주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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