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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Jan 24. 2022

그리스 비극의 주제

그리스 연극-9

그리스의 비극은 사랑, 상실, 자만, 권력의 오용, 신과 인간 사이의 위태로운 관계 등 광범위한 주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자만(hubris)은 그리스 세계에서는 하나의 범죄였고, 다른 사람들을 난폭하게 다루는 행위는 자만의 결과로 보았다.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불리는 인간의 보편적인 결함들--- 탐욕, 의심, 열등감, 배신, 증오 등--- 가운데에서도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만을 가장 보편적인 결함이라고 보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는 자신을 능멸한 바다에 300번이나 채찍질을 하고 달군 쇳덩이를 던졌으며, 자신의 아들을 병역에서 빼려던 신하의 아들에게 허리를 절단하는 요참 형을 가한다. 또한 병사들을 강제로 동원해 바다 위에 다리를 놓는 등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결국 그는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하여 그의 대제국을 쇠퇴시켰다. 전쟁에 패하고 페르시아로 돌아가서도 화려한 궁정을 짓고 학정을 일삼다가 결국 신하들의 쿠데타로 살해당한다. 자만의 파멸을 보여주는 역사의 기록이며 교훈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또한 운명을 신봉했다.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원리에 의한 것이며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삶의 길은 이미 신에 의해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의 비극을 ‘운명의 비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운명의 수레바퀴’(a wheel of fortune)가 이끄는 대로 끌려간다. 결국 그는 ‘겪지 않아도 될 불행’(underserved misfortune)으로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명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을 변화시킨다. 그에 따르면 비극이란 본래 착한 사람이 치명적인 실수와 그릇된 판단으로 몰락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상황이 주인공에게 고통과 함께 삶에 대한 통찰을 동시에 준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안타까운 동정심과 그 비극적 상황에 대한 두려움에 빠진다. 이 연민과 공포의 감정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왜냐면 그러한 고통과 번민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비극의 효과는 ‘카타르시스’(catharsis)---감정의 순화 또는 배설---를 통해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제거하고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시지프스의 고통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성’(plot)을 비극의 영혼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비극의 구성은 ‘사건들의 배열’로 정의될 수 있다. 즉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들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방식(구조)을 뜻하는 것이다. 고전극 초기에는 프롤로그에서 코러스가 노래와 춤으로 현재의 사건에까지 이르게 된 과거의 사건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구성의 핵심은 받아들일만한 원인과 결과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일련의 행위들을 분명한 인과관계 속에서 구성하고 있는 비극이 주로 주인공의 성격이나 행위에 초점을 맞춘 극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스 비극의 구성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주인공에 의해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진다. 그 죄의 어리석음과 오만함이 처음에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주인공은 서서히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그에 의해 그의 주변 세상은 무너지고 만다. 따라서 주인공의 가장 중요한 행위는 자신을 약화시키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비극의 핵심은 ‘고통을 통해 배우는 것’(learning by suffering)이라 할 수 있다. 교훈이나 새로운 인식이 없는 고통은 슬프기는 해도 비극적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비극은 고통을 통해 배움으로써 더 큰 인간의 도덕, 세계의 질서를 구축하는 일인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칭송받는 인물이어야 한다. 관객은 그러한 인물이 어려움에 처할 때 더 큰 동정심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고상하고 칭송받는 인물일수록 관객의 두려움과 슬픔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요 인물들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인 이유이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 그 충격도 크다는 원리이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데 카시부스’(De Cassibus) 효과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비극의 원리는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다가 19세기 말 사실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보통 사람들의 비극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범죄자, 창녀, 노동자, 광부 등 사회구조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인물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고대의 원리와 반대되는 논리라고 보기보다는 현실의 아픔을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들의 비극을 끌어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비극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반드시 개인적인 오류나 어리석은 결정의 결과이어야 한다. 비극에서 무고한 희생자 따위는 없다. 진정 비극적인 몰락은 우연이나 불운에 의한 것일 수 없다. 비극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관객의 연민과 공포는 마침내 위안과 환희로 변화된다. 위에 언급한 현대의 사실주의 비극에서는 개인의 오류에 덧붙여 사회라는 구조적인 악(惡)이 함께 등장한다. 오히려 경제,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박해가 한 개인을 원치 않는 비극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적인 비극의 정의는 오늘날의 비극 작품에 적확하게 적용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운명과 사회구조, 개인적 오류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상관적 구조는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사회적 악에 대한 인식과 저항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개혁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도덕과 질서를 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오늘날에도 중요성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전 500년 그리스에 등장한  비극의 압도적 영향은 유럽 전역의 비극 작가들에게 널리 전승되었고, 2000년 후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아테네의 비극 작가들은 테베, 페르시아, 이집트 같은 이국적 장소에서 벌어지는 과거의 시간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이러한 희곡 작품들은 모두 높은 수준의 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관한 것이었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왕이나 왕비, 귀족, 영웅처럼 신과 가까운 세계 속에 사는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이 겪은 사건들은 현대인들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은것이었다. 작품 전체 속에 올림퍼스의 신들이 등장하는 신화적이고 초자연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비극적인 현실이 현대삶에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오늘의 우리가 그리스의 비극 작품들을 관심을 갖고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의 비극들 속에서 표현되는 수많은 인간의 결함과 그에 따른 파국은 오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등장인물의 높은 지위와 고매한 대사로 고양되는 삶의 모습  대신에 우리는 현대의 비극을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늘의 우리도 겪을 수 있는 고통과 번민, 내면의 갈등을 얘기함으로써 시대를 초월한 근본적인 문제와 고통을 예언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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