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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Mar 02. 2022

세네카의 비극, ‘티에스테스’

로마 연극-5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Thales)는 그의 제자들의 농담에 짜증을 내곤 했다. 그 농담은 “능력 있는 사람은 행동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철학을 한다.”(Those who can, do, others philosophize)라는 것이었다. 이후 20세기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이 농담을 패러디하여 “능력 있는 사람은 행동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르친다.”(Those who can, do, others teach.)라고 말함으로써 많은 교육자들을 분노(?)케 하였던 것이다. 탈레스는 그 농담을 가슴에 깊이 새겼을까? 그는 현명한 처세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고, 그로 인해 철학적 추구는 능력 있는 사람의 행위였음을 증명해 보였다.  


세네카 역시 그랬다. 그에게도 부와 재산의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어떻게 금욕주의 스토아 철학자가 로마 제국의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이 역설만으로도 세네카는 고대 사회의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금전의 문제는 그의 사상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측면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2,000여 년 전 스페인 남부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유명 작가였으며 그의 조카는 시인 루카누스(Marcus Annaeus Lucanus (39~65 A.D. 영어로 루칸, Lucan, 로마제국의 시인)였다. 세네카는 정치에도 참여하였고, 이후 재정 분야의 고위직에 올랐으며, 여러 편의 비극을 쓰기도 하였다.


그의 삶은 서기 41년에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는 세네카가 자신의 조카이자 시저의 여동생이었던 줄리아 리빌라(Julia Livilla)와 간통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그를 코르시카 섬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이다. 유배 생활 중에 그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8년 뒤 세네카는 미래의 황제 네로(Nero)의 어머니 아그리피나(Agrippina)의 보증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네로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네로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고 전제적인 황제 중 하나가 되었으므로, 세네카라는 인물에 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세네카의 재산은 대부분 네로를 위해 일하던 때 축적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기 65년 그는 네로의 ‘자살 명령’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네로는 세네카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에 참여하였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세네카의 죽음 : 스페인 화가 산체스(1840~1906)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스토아 철학(stoicism)은 그의 삶에 불변의 상수(常數)였다. 세네카가 철학의 길에 들어선 것은 어린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철학자 아탈루스(Attalus)의 영향 때문이었다. 세네카는 또한 정치가이며 스토아 철학자였던 카토(Cato, 95~46 B.C.)의 숭배자였는데 카토는 세네카의 저술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토아 철학에만 묶여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에피쿠로스(Epicurus) 학파를 비롯해 여러 사상을 자유로이 차용하기도 하였다. 세네카는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영국의 사상가), 파스칼(Pascal,  1623~62,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사상가), 몽테뉴(Montaigne, 1533~1592, 프랑스의 사상가)등 후대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그에 대한 관심은 이어지고 있다.  


세네카에 대한 높은 관심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는 철학에 관한 글을 썼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삶을 다루고, 운명의 굴곡을 헤쳐 나갔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부(富)의 실현에서 유배형으로, 품위 있는 지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황제의 명령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삶 속에서 그는 자신의 철학을 세워갔던 것이다.    

철학자로서의 그의 삶은 모순적이다. 거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로마 역사 상 가장 잔인하고 난폭한 황제의 스승이기도 했던 세네카. 그는 자신의 글에서 우리에게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한다. 과연 그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을까? 후대의 비평가들은 그를 가리켜 고대 세계에 유례를 찾기 힘든 위선자였다고 혹평한다. 하지만 그의 삶을 위선으로만 볼 수 있을까? 세네카는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삶은 부와 권력, 야심과 정치의 삶이었으며 동시에 철학과 성찰과 자각의 삶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자리한 이 이중성은 철학적 사유(思惟)와 물리적 현실 사이의 거리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네카 비극’(Senecan Tragedy)은 무운시(無韻詩, blank verse) 형식으로 쓴 열 편의 서재극(書齋劇, closet drama: 공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읽히기 위한 극)을 의미한다. 이 중 여덟 편은 세네카 자신이 쓴 작품이며 다른 두 작품 중 하나는 누군가에 의한 모작(模作)이고 다른 하나는 저작 시기가 세네카의 사후이어서 그의 작품 목록에서는 배제되고 있다. 16세기 중반 이태리의 인문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된 그의 비극들은 르네상스 무대에 재현된다. 이 시대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연극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들은 세네카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던 것이다. 세네카의 비극들은 주로 그리스 작가들인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다시 쓴 것으로 보통은 상류층들의 모임에서 낭독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작들과는 달리 그의 희곡들은 웅변조였고, 서술적이었으며 과도하게 도덕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수사(修辭)적이었다. 끔찍한 행위들을 상세히 묘사하는 한편 긴 성찰의 독백이 이어지기도 한다. 극에 신들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유령과 마녀들은 빈번히 나타난다. 그리스의 원작들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는 세네카의 극들이 고전 드라마의 전형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모두 능통했던 프랑스 학자 J.C. 스칼리제르(J.C. Scaliger, 1484~1558)는 에우리피데스 보다는 세네카를 더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연극 전통은 17세기 피에르 코르네유(Pierre Corneille, 1606~1684)와 장 라신(Jean Racine, 1639~1699년)의 비극에서 정점을 이루었는데 이들 모두 세네카의 형식과 문체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신고전주의자들은 극에 콘피댄트(Confidant: 주인공이 믿고 비밀을 털어놓는 대상, 주로 하인)를 새로이 도입하고, 행동을 대사로 대체하였으며, 도덕적인 엄밀성 등을 강조한 세네카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들은 세네카의 유혈 낭자한 복수의 주제들이 영국적 취향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토머스 색빌(Thomas Sackville, 1536~1608)과 토마스 노턴(Thomas Norton, 1532~1584)의 공저인 영국 최초의 비극 ‘고보덕’(Gorboduc)은 무참한 살인과 복수의 극으로 세네카의 극을 직접적으로 모방하였다. 또한 세네카의 비극은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에서 복수와 죽음, 유령의 등장 등을 통해 재현되기도 하였다. 


세네카가  쓴 것으로 알려진 여덟 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트로이의 여인들(The Trojan Women) 

(2) 오이디푸스(Oedipus) 

(3) 메데아(Medea) 

(4) 미친 헤라클레스(The Mad Hercules) 

(5) 페니키아 여인들(The Phoenician Women) 

(6) 페드라(Phaedra) 

(7) 아가멤논(Agamemnon) 

(8) 티에스테스(Thyestes)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모든 작품들은 그리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등의 작품을 각색한 것이었다. 이 외에 두 작품 “옥타비아‘(Octavia)와 ’오에타 산(山)의 헤라클레스‘(Hercules on Oeta)도 ’세네카 비극‘의 범주에 들기는 하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이 두 편의 희곡 중 ‘오에타 산의 헤라클레스’는 세네카 비극의 모작(模作)이었고 ‘옥타비아’는 네로의 죽음 이후에 써진 것으로 보이므로 세네카의 작품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확실히 세네카가 집필한 희곡은 위의 여덟 작품이다. 그중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Tyrannus)에서, ‘아가멤논’은 아이스킬로스의 동명 희곡에서, ‘티에스테스’(Thyestes)는 출처가 불분명한 로마의 작품에서 나왔고,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에우리피데스의 희곡들을 각색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네카는 원전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과감히 삭제하거나 재구성했다. 


세네카의 희곡들이 로마의 극장에서 공연되었는지 아니면 소수의 관객들 앞에서 낭송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몇몇 학자들에 따르면 부자였던 세네카가 극장 공연을 위해 희곡을 쓰는 것은 천박한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라 지적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희곡들은 종종 무대 공연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무시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더하면 그의 작품들은 분명 무대 위에서 공연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네카의 비극들은 코러스에 의해 다섯 개의 이야기로 나누어진다. 이 5막의 형식은 이후 르네상스 연극의 규범이 되었다. 이 외에도 세네카는 독백(soliloquy)과 방백(aside)의 기법을 사용하여 이후의 연극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세네카 극의 가장 큰 특징은 폭력과 공포의 장면들일 것이다.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에서는 조카스타(Jocasta, 오이디푸스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자신의 자궁을 찢고, ‘티에스테스’에서는 자식들의 시신이 연회장의 요리가 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폭력적 장면들은 이후의 작가들에 의해 재연되었는데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동시대 영국 작가인 존 웹스터(John Webster,1580~1632)의 ‘말피의 공작부인’(The Dutchess of Malfi)에서는 공작부인의 오빠들이 그녀의 남편과 자식들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세네카는 마법, 죽음, 초자연적인 것들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이는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 1564~1593)를 포함해 많은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극작가들에 의해 재현된다. 


티에스테스(Thyestes) 

복수의 여신들(Furies) 중 하나인 메가에라(Megaera)가 탄탈루스(Tantalus,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의 조부)의 유령에게 그의 가문에 드리운 죄와 벌 고통들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살인, 근친상간, 간통, 자만과 광증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메가에라는 티에스테스가 그의 동생인 아트레우스가 베푼 만찬에서 자기 자식들의 시신을 먹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공포에 사로잡힌 탄탈루스는 두 손자 사이의 갈등을 억누르려 하지만 메가에라는 오히려 그들의 싸움을 부추긴다. 코러스가 탄탈루스 가족의 죄와 벌에 관해 말하고 가족의 불행이 끝나기를 기원한다.


아트레우스는 자신과 미케네의 왕권을 다투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내 아이로페를 유혹하고 있는 쌍둥이 형 티에스테스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 차있다. 그의 시종이 그에게 분노를 억누르길 청하지만 아트레우스는 오만한 데다 자제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형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그 시신을 만찬장의 요리로 내놓을 생각을 드러낸다. 그는 부하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들인 아가멤논과 메넬라우스를 시켜 화해를 빙자해 망명해 있던 티에스테스를 궁정으로 돌아오도록 유인한다. 다시 코러스가 등장하여 나름대로 왕의 자격에 대해 말하고 탄탈루스 집안에 화목이 찾아오길 염원한다. 


티에스테스는 즐거운 마음으로 궁에 돌아와 세 아들의 인사를 받는다. 그는 더 이상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곤궁해도 조용한 삶을 갈망한다. 아트레우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여전히 의심을 품은 티에스테스에게 그의 아들은 아트레우스가 진심일 것이라고 말한다. 아트레우스는 티에스테스를 반기는 척 하지만 속으로 증오심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티에스테스에게 왕국을 나누어 통치할 것을 제안한다. 티에스테스는 놀랐지만 비로소 의심을 풀고 화해를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코러스가 등장해 집안의 유대감을 노래하며 형제간의 싸움이 평화로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이후 전령이 무대에 나와 궁 안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말한다. 아트레우스는 티에스테스의 자식들을 제단 앞에서 살해해 그들의 사지를 자르고 그들의 시신으로 수프를 끓인다. 코러스는 아트레우스의 죄로 인해 기괴한 어둠이 도시를 휩싸고 있음을 말한다. 공포 속에서 신들도 태양의 길을 되돌렸던 것이다.  


아트레우스는 자신의 계략이 성공한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반면 티에스테스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모른 채 자신의 행운을 노래한다. 그러나 아트레우스는 티에스테스에게 피를 섞은 와인을 권하며 커다란 접시 위에 놓인 아들들의 머리를 보여준다. 공포에 사로잡힌 티에스테스는 아들들의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지만 아트레우스는 이미 티에스테스 자신이 그들을 먹어버렸다고 말한다. 경악한 티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다짐한다. 하지만 신들에게 올린 징벌에 대한 그의 간구는 아무런 응답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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