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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Mar 09. 2022

중세의 연극(1)

연극의 죽음과 재탄생



중세 유럽은 신 중심의 종교적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5세기 로마제국의 분열과 함께 과거의 영토들은 군소 권력자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유럽의 중세는 5세기 말에서 르네상스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500년까지 지속된다. 그 천 년의 세월 동안 유럽은 주로 농경문화를 이루고 있었고, 지주와 왕들이 통치하던 피지배계급들은 혹독한 현실을 살고 있었다. 귀족들의 탄압도 그러했지만 삶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농부들은 거의 매일 해 뜨면 일어나 해 질 때까지 단지 생존만을 위해 일해야 했다. 노역을 완화시켜줄 만한 기구들은 거의 없었고, 의학도 낙후되어 질병이 전 지역에 걸쳐 창궐했다. 특히 흑사병(Black Death)이라 불리는 선(腺) 페스트는 불과 두 세대 만에 유럽 인구의 절반에서 2/3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한 도처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수많은 내전들과 더불어 650년 경 이후에는 중동 지역에서 확산된 이슬람들의 침공이 이어졌다. 이런 이유로 이후의 르네상스 학자들은 이 시기를 ‘암흑의 시대’(Dark Age)라 불렀다. 그러나 대중들의 고난과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중세가 암흑의 시기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지식과 예술의 광범위한 확산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이 중세의 교회이다. 로마제국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톨릭이라 불리는 로마 교회는 살아남았다. 사실 그것은 그 시대 기독교의 한 지파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 같은 삶 속에서 지닌 것은 희망뿐이었다. 죽음 뒤에 올 더 나은 삶, 구원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그것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다. 교회는 모든 중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교회가 교육의 내용과 기회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던 사람은 교회의 사제들뿐이었다. 심지어는 왕들조차도 대부분 문맹이었다. 모든 서신들은 귀족들에 의해 고용된 사제들에 의해 쓰였고, 서신을 받은 사람도 고용한 사제를 통해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정치에도 영향력을 갖게 된다. 교회는 거대한 부(富)의 창고가 되었고, 왕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로부터 비용을 차용하기도 하였다. 중세 초기 유럽의 가장 강력한 지배자는 교황이었다. 9세기 후반 스페인과 중부 유럽에 대한 무슬림들의 침공을 막아내어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던 샤를마뉴 대제(Charles the Great)조차도 제 이인자였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몰락은 연극의 종말 이기도하였다. 수백 년간 공식적인 극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규모의 유랑 집단들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유흥을 제공하며 비참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들은 곡예사, 가수, 팬터마임과 인형극 연기자들이었다. 소수였으나 그들은 유럽 전역에 퍼져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극장도 없었고 연극적 발전도 상상할 수 없었다.  

10세기, 오늘날 독일 남부 작센 지역 간데스하임(Gandersheim)의 수도원에 있던 흐로스비사(Hrosvitha)라는 이름의 수녀가 고대 로마에서 전해진 시와 문학을 통해 라틴어를 배우고 있었다. 로마 작가들의 라틴어 텍스트를 사용해 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를 배우는 것은 당시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흐로스비사 수녀는 라틴어를 읽게 된 후 테렌티우스의 희곡들을 만나게 된다. 여섯 편의 그의 희곡들은 모두 후기 로마 희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흐로스비사 수녀는 그 작품들 속에 드러나는 여성들에 대한 묘사에 충격을 받았다. 여성들은 대부분 창녀나 학대받는 아내들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흐로스비사는 테렌티우스의 희곡을 각색해 여성들을 좀 더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원본에 포함된 이교(異敎)적인 믿음을 배제하여 구원과 선한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그녀가 각색한 희곡들은 다른 수녀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동시에 그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흐로스비사 수녀가 보여준 의도와 열정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도 퍼져있었다. 많은 이들이 라틴어를 배우기 위해 읽어야 했던 이교적 주제의 라틴희곡들을 기독교적으로 각색하였다. 그리고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로마 교회의 베네딕트회 수녀였던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of Bingen)였다.


동로마(비잔틴, 이후 콘스탄티노플, 오늘날 이스탄불)에서는 연극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로마적이었던 까닭에 연극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곳의 연극도 거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15세기까지 계속되었지만 현대의 연극이 그 전통으로부터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의 연극은 흐로스비사나 힐데가르트의 작은 발전들로부터 시작된 서유럽의 연극적 흐름 속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교회가 연극을 폐지했지만 연극이 다시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교회 때문이었다. 중세의 교회 의식은 라틴어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제들을 제외한 누구도 라틴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신도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묘사한 미술작품들이나 혹은 가끔씩 그들의 언어로 이루어지는 강론을 통해 성서를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교회는 연극적 방법을 이용하여 성서의 이야기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문맹의 신도들에게 교회의 가르침과 구원의 길을 알려주게 된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두 가지 근본적인 연극의 형식을 만들어 낸다.  


성찬극(Liturgical Plays)

중세에 이루어진 연극의 재탄생은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시작되어 교회의 제단, 교회의 계단 그리고 마을의 광장으로 이어져 간다. 앞서 언급한 대로 중세 연극은 초기 로마 연극을 기독교적으로 각색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와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 것은 아니었고 일반 대중과 공유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교회가 스스로 성서의 메시지를 신도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교회 내에서 연극적 행위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교회 내에서 이루어진 연극을 성찬극(Liturgical Plays)이라고 부른다.  


성찬극에서는 성서의 구절들이 교회 내 제단을 배경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구절들은 본질적으로 극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예수가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와서 결국 배신당하고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 수난 주간의 이야기가 그랬다. 그 이야기에는 극적인 요소가 많았고, 성찬극을 통해 표현되었던 것이다.


사제들 뿐 아니라 성가대의 독창과 합창들도 이러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을 묘사하고 그와 관련된 성서의 구절을 읽어주었다. 성서가 라틴어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들 자체도 라틴어로 낭송되었다. 그러나 설교를 통해서나 교회의 그림들을 통해 배웠던 이야기들이 극적인 요소들로 인해 신도들에게 가깝게 다가오고, 그들로 하여금 이야기의 중요성과 실제성을 느끼게 할 수 있었다. 라틴어로 되어 있는 성서 속의 이야기가 이러한 극적인 활동의 대본(臺本)이 되었던 것이다.


버나쿨러 극(Vernacular Plays)


교회가 중심이 된 또 다른 형식의 연극은 버나쿨러 극(Vernacular Drama)으로 알려진 것이었다. 것은 관객들의 일상 언어로 이루어진 극을 뜻한다. 즉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라틴어가 아닌 관객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공연했던 것이다. 라틴어가 교회의 공용어였기 때문에 이러한 공연들은 교회 내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교회의 정문 앞 계단에서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교회의 계단은 공연 공간을 만들기 위해 높게 지어지기 시작했다. 공연을 보기 위해 신도들이 몰려들자 극은 교회에서 떨어진 마을의 넓은 지역, 광장이나 시장터로 이전하게 된다.  


극들은 성서 속의 문장을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꾸어 쓴 것이었다. 또한 중요한 지역 행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고, 사회적 요구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이러한 내용들이 성서의 이야기들보다 훨씬 길어지는 때도 있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이 극들이 교회에 대한 지원 또는 미사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일종의 선전 기구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연의 기본적인 목적은 성서의 중요한 구절을 가르치고 그것을 공동체의 필요에 맞추어 해석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버나쿨러  극은 ‘신비극’(Mystery Plays)와 ‘도덕극’(Morality Plays)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신비극과 도덕극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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