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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Mar 25. 2022

르네상스 연극(4)

르네상스 시대 영국 연극의 공연과 극작가들

르네상스 시대 영국 연극의 공연 


르네상스 시대 영국의 극단들은 레퍼토리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여러 달, 여러 해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현대의 공연과는 달리 당시의 극단들은 이틀 연속 같은 희극을 공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1624년 8월, 토머스 미들턴(Thomas Middleton)의 ‘체스 게임’(A Game at Chess)이 9일 동안 연속 공연되다가 그 정치적 내용 때문에 당국에 의해 중지되었는데 이는 매우 독특하고 전례 없는 것으로 이후에도 같은 경우가 반복된 적은 없었다. ‘스트레이지 공(公) 극단’(Lord Strage’s Men)이 로즈 극장에서 공연했던 1592년 시즌의 경우가 전형적이었다. 그해 2월 19일부터 6월 23일까지 이 극단은 성(聖) 금요일(Good Friday, 예수의 수난일로 부활절 전(前) 금요일)과 다른 이틀을 빼고 일주일에 6회씩 23편의 각기 다른 희곡을 공연하였다. 어떤 것은 단지 하루, 토머스 키드(Thomas Kyd)의 ‘스페인의 비극’(Spanish Tragedy)을 기반으로 한 ‘히에로미노’(Hieromino) 1부처럼 인기 있는 작품은 15번까지 공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틀 연속으로 같은 희곡이 공연된 적은 없었고, 일주일에 두 번 공연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배우들, 특히 여러 작품에 참여해야 했던 주연 배우들의 부담은 엄청났다.    


당시 극단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모두 남성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여성 역은 청소년기의 어린 남자 배우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명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공연은 주로 오후에 이루어졌다. 햇빛이 사라지면 촛불을 켜고 연극이 계속되었고, 무대 배경은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배우들에 의해 묘사되었다. 

르네상스 영국 연극의 의상 

이 시기의 의상은 밝은 색채였고, 화려하고 값 비싼 것이었다. 하지만 공연이 급속도로 확대됐던 까닭에 작품 속 시대 의상을 고증에 맞추어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배우들은 자기 시대의 의상을 입고 공연해야 했다. 가끔 후원자들이 시대 의상을 협찬하였지만 대체로 동시대의 의상이 주를 이루었다.


의상은 또한 등장인물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색깔뿐 아니라 천의 종류도 계급을 반영함으로써 무대 위의 배우가 어떤 역을 하는지 알려주었다. 1574년에 제정된 ‘사치 금지법’(English Sumptuary Law)은 특정 계급이 입을 수 있는 의상의 색깔, 스타일과 옷감을 규정하였는데, 허가된 극단에 속한 배우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신분을 넘어서는 의상을 입는 것이 허용되었다.  


희곡작가들 


런던의 인구가 늘고 부(富)가 증가함에 따라 사람들은 멋진 볼거리(Spectacle)를 찾게 되었고 이는 다양한 공연과 극작의 발전을 가능케 하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써진 희곡의 대부분은 소실되었지만 그럼에도 600편 이상의 작품이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희곡을 쓴 작가들은 보잘것없는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은 사람도 있었다. ‘유니버시티 위츠’(University Wits)라 불리는 이들은 케임브리지 출신의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 토머스 내시 (Thomas Nashe)와 옥스퍼드 출신의 존 릴리(John Lyly), 토머스 로지(Thomas Lodge), 그리고 조지 필(George Peele) 등이 있었다. 토머스 키드(Thomas Kyd)는 대학을 나오지는 못했지만 그의 박식함 때문에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한 때 벤 존슨(Ben Jonson)은 새로이 부상하는 신예 작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라틴어를 잘 알지 못하고, 그리스어는 더욱 모르는’(Little Latin, less Greek)이라 표현했는데, 이는 셰익스피어의 교육 수준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존슨의 그러한 표현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폄하의 말이라기보다는 그런 제한된 학력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작품을 쓰고 있다는 찬사였다. 

르네상스 영국의 극작가들 

그렇듯 당시의 작가들은 현대의 시인이나 지식인의 이미지에 부합되지 않았다. 그들은 극이 호평을 받으면 그날 공연 수입의 일부를 받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극에 대한 소유권은 없었다. 작품이 극단에 팔리면 그 소유권은 극단에 있었고 작가는 캐스팅, 공연, 작품의 수정이나 출판에 아무런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다.  


극작가라는 직업은 어렵고 수입도 적은 일이었다. 연극 제작자였던 필립 헨슬로우(Philip Henslowe, 1550~1616)의 기록에 다르면 1600년 경 몇 해 동안 그는 작품 하나 당 6-7 파운드 밖에는 지불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아마도 최저 금액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최고의 극작가조차도 높은 저작료를 요구할 수 없었다. 혼자서 작업하는 작가는 일 년에 기껏해야 두 편 정도를 써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1630년대 리처드 브롬(Richard Brome)이 솔즈베리 코트 극장과 계약할 때의 조건은 연간 세 편의 희곡을 쓰는 것이었지만 그는 그 부담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셰익스피어도 20년 이상의 극작가 생활을 통해 37편의 작품을 썼을 뿐이었다. 그가 재정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배우를 겸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속한 극단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벤 존슨 또한 궁정 가면무도회에 물품을 조달하였고, 특히 당대의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부분이었던 후원제도(patronage)를 잘 이용함으로써 재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극작가들의 생활은 궁핍했다. 조지 필(George Peele)이나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과 같은 초기 극작가나, 리처드 브롬(Richard Brome), 필립 매신저(Philip Massinger)와 같은 이후의 작가들도 재정적인 불확실성, 가난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극작가들은 둘에서 다섯 명까지 팀을 짜서 희곡을 써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써진 대다수의 희곡들은 공동 작업이었다. 셰익스피어와 존슨 같은 작가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작품을 공동으로 작업하는 것은 수익을 인원수대로 나누는 것을 의미하였지만, 수입의 면에서는 작가들에게 유리할 수 있었다. 토마스 데커(Thomas Dekker)의 70여 편에 달하는 작품 가운데 대략 50편 정도가 공동 작업이었다. 1598년 한 해만 해도 데커는 극단주인 필립 헨슬로우를 위해 공동 작업으로 16편의 작품을 내놓았고 이로써 30파운드를 벌었는데 이는 주당 12실링이 조금 안 되는 금액이었다. 이 금액은 작가들이 하루에 평균 1실링을 번 것에 비하면 거의 두 배에 이르는 것이었다. 토머스 헤이우드(Thomas Heywood)는 그의 저작으로 되어있는 220편의 작품 가운데 일부는 자신이 전체를 썼고 일부는 주(主) 작가로서 극작에 참여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한 작가가 희곡 한 편을 쓰는 일은 몇 달의 시간을 요하는 것이었다.(존슨은 자신의 ‘볼포네’(Volpone)를 5주 만에 썼다고 하였지만) 헨슬로우의 기록에 따르면 4-5명의 작가가 팀을 이루면 두 주 만에 한 편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헨슬로우는 자신의 집에서 작업을 한 작가들---안토니 먼데이(Anthony Munday),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리처드 해스웨이(Richard Hathwaye), 헨리 체틀(Henry Chettle) 등과 심지어는 어린 시절의 존 웹스터(John Webster) 조차도---은 선금을 받고 작업을 시작해도 무대에 올릴만한 작품은 거의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작품들은 거의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당시 작가들의 공동 작업에 대해 이해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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