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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용훈 May 11. 2022

플라톤의 '국가'-제2권

폴리테이아(Politeia)

제2권 요약 (1)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쿠스에 대해 적절히 대응했다고 생각해 정의에 대한 논쟁은 마무리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도달한 결론에 만족하지 못했다.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대해 좀 더 분명한 입장을 보여주길 기대하면서 모든 선한 행동을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한다. 첫째는 체육이나 의학과 같이 그 결과만을 원하는 것들이고 둘째는 기쁨과 같이 그 자체로서 만족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지식, 통찰, 건강 등과 같이 가장 수준 높은 것으로 그 자체뿐 아니라 그 결과까지를 원하는 것들이다. 글라우콘을 비롯해 토론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정의는 바람직한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이 그 자체와 결과 모두를 원하는 가장 높은 단계의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주길 원하였던 것이다.


글라우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의를 첫째의 범주로 분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정의를 더 큰 악을 피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필요악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는 인간의 나약함과 취약성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모두 서로 간에 불의를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에 동의하는 사회적 계약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정의라는 짐을 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없다면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의는 그 자체를 위해 실행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과 나약함 때문에 필요로 되는 것이다.


자신의 논점을 강조하기 위해 글라우콘은 흥미로운 가정을 제시한다. 신화 속의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인용하며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마법의 반지를 얻게 되는 일을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일단 반지를 갖게 되면 그는 보복의 두려움 없이 부당한 행위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글라우콘은 가장 정의로운 사람조차도 반지를 갖게 되면 부당하게 행동하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자신의 물질적이고 권력 지향적이며 호색적인 충동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지와 관련된 이 전설은 사람들이 단지 불의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정의롭게 행동할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도 정의 자체가 바람직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은 없다.


글라우콘은 사람들은 정의로운 것보다는 불의를 더 좋아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지극히 불의한 삶이 완벽하게 정의로운 삶보다 더 즐겁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탐욕스러운 충동에 빠진 완전히 불의한 사람이 영예와 부를 얻는다. 반면 완전히 정의로운 사람은 경멸당하고 비탄에 빠지게 된다.


그의 형제 아데이만투스가 끼어들며 글라우콘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서는데 누구도 정의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현세와 내세에 가져다줄 보상을 찬양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외부의 보상 없이도 정의가 바람직한 것임을 보여달라는 글라우콘의 요청을 되풀이한다. 다시 말해 정의는 기쁨, 건강, 지식처럼 그 자체만으로 바람직함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제2권 분석 (1)


제1권에서 정의에 대한 트라시마쿠스의 공격에 이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투스가 제기한 사회 계약설과 사후의 보상이라는 개념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도전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미 정의를 불신하는 여러 생각들이 제기된 마당에 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기도 전에 사회 계약이니 보상이니 하는 것들을 꺼내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이다. 언제나 상대의 가장 강한 면을 공격하는 것이 최상이다. 플라톤은 정의가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했지만 이후 상대가 다시 등장해 “하지만 정의는 단지 사회적 계약일뿐이지.”하고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정의를 옹호함에 있어서 비도덕적인 상대들의 가장 강력한 주장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다.


정의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플라톤이 철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앞서의 대화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종종 소피스트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마지막 상대는 트라시마쿠스였다. 그 이후로 ‘국가’ 속의 소크라테스는 근본적으로 그릇된 가치관을 지닌 이들과는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식 논법과 아포리아의 기법에서 벗어나 보다 건설적인 노력을 통해 이론을 세우고자 하는 플라톤의 시도였던 것이다.


‘국가’는 플라톤의 생애에서 전환기적 단계에 쓴 책이었다. 그 시기 그는 ‘아카데미아’를 설립하였는데 그곳은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철학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교였다. 생전에 그는 거리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의 방식을 포기하였고, 글에서도 소피스트들과 같은 대담자들은 피하고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투스 같은 비교적 자신의 주장이 강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을 대화 상대로 신중히 선택하고 준비했던 것이다.


이 시기 플라톤은 철학이란 협력적이고 건설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질 때만이 진전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자신의 글 속에서 소크라테스와 함께 진지하게 학문에 임하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투스는 대화 상대의 역할을 하기 위해 반복적인 도전을 시도한다. 하지만 트라시마쿠스와의 토론이 아포리아로 이끌 뿐이었다면 글라우콘이나 아데이만투스와의 대화는 긍정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방식에 대한 배신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플라톤이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시도한 데에는 아마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강력한 적들과 대치하는 것은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 만일 대화의 상대가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면 실질적인 진전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기껏해야 상대의 견해를 반박은 할 수 있겠지만 함께 긍정적인 이론을 세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2권 요약 (2)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그 자체로, 저절로 바람직한 것임을 입증하라는 요구에 대응하기를 꺼렸지만 다른 이들의 강력한 요청이 있자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이론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정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국가나 도시에 속한 정치적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인의 정의 즉 개인적 정의이다. 도시가 개인보다 크므로 소크라테스는 먼저 국가나 도시의 측면에서 정의를 살피고 이후 개인에게도 유사한 미덕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가정을 세웠다. 정치적 정의를 찾기 위해 그는 완벽하게 정의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그 정의가 도시 속에 자리 잡게 되는 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시도는 제4권에 이를 때까지 ‘국가’의 주요한 논제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사회의 근본 원리 즉 전문화의 원리를 소개한다. 전문화라 함은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다른 일에는 일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다. 목수는 나무를 깎아 물건을 만들고, 농부는 농사만을 지어야 한다. 이 원리의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은 인간에게는 충족되어야 할 타고난 특유의 기질이 있다는 것이다. 전문화는 노동의 분화, 그것도 가장 적절한 분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방법으로 모든 것들이 가능한 가장 높은 단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


소크라테스가 구축하는 도시의 첫 번째 역할은 음식, 의복, 보건 및 거주 등과 같이 생활에 필수적인 것들을 제공하는 일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기술자, 농부, 의사들처럼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다른 역할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표현에 따르면 ‘생산 계급’에 속해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들로 구성된 도시를 “건강한 사회”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 사회가 필수 불가결한 욕망으로만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오직 생산자들만 있으며 이들은 단지 삶에 꼭 필요한 것들만을 만들어낸다. 반면 글라우콘은 그러한 도시를 “돼지들의 도시”라고 비난한다. 실제로 그러한 도시는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 이다. 사람들은 필수적인 욕망만이 아니라 불필요한 욕망도 지니고 있어서 더욱 맛있는 음식, 보다 사치스러운 환경과 예술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의 다음 단계는 사치스러운 도시 혹은 “열병에 걸린 도시”로의 전환이다. 사치품들이 요구되면서 상인, 배우, 시인, 교사, 미용사들의 직업이 생겨난다. 이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전쟁을 야기하기 때문에 도시 내에 평화를 유지하고 외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사(戰士) 계급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생산자들은 전사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데 그것은 전문화의 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제2권의 나머지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라고 불리는 이 전사들의 본성과 교육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수호자들은 부드러움과 강인함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사악해서는 안 되며 나약하거나 무능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이들은 올바른 천성과 심성을 지닌 사람들로 신중하게 선별되어야 한다. 특히 수호자들은 용기 있고, 명예를 존중하며 철학적이거나 학문을 사랑하고, 육체적으로는 강인하고 단단해야 한다.


수호자들을 육성하는 데 있어서는 천성만으로 충분치 않다. 그 천성은 교육으로 유지되고 더욱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수호자들에 대한 교육에는 육체적 훈련과 더불어 영혼을 위한 음악과 시 등이 포함된다. 그것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일로서 불건전하고 사치스러운 도시가 정화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수호자들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느낀 소크라테스는 그것에 대해 지극히 세밀히 설명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도시 내에서 허용될 수 있는 이야기들에 대해 말한다. 훈련받는 젊은 수호자들에게 해주어야 할 이야기는 면밀히 검토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다루는 가에 따라 아이의 모습이 결정되듯, 그 이야기들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형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제2권의 나머지 부분들은 신들에 관해 허용 가능한 이야기들에 대한 토론으로 채워진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통제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신은 언제나 전적으로 선하며, 세상의 선한 것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 만일 신이 이와 다르게 규정된다면, 예를 들어 전통적인 시들이 묘사하듯, 호전적이고 교활하며 잔인하게 그려진다면 젊은이들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행위가 허용될 수 있고 심지어 찬양될 수 있다고 믿으며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신은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마법사 혹은 거짓말쟁이로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젊은이들이 진실과 정직에 대한 존중심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2권 분석 (2)


플라톤의 사상에서 보자면 교육의 기본적 원리는 영혼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로 건강하거나 건강치 못한 상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영혼이 소비하는 것과 그것이 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교육은 영혼이 어떠한 이미지와 생각을 소비하고, 영혼이 어떠한 활동들을 할 수 있는지 혹은 할 수 없는지를 결정한다. 영혼은 언제나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도시 내에서 가능한 자극들은 엄격히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영혼을 끊임없이 풀을 뜯는 양에 비유한다. 만일 양을 독초로 가득한 들판에 풀어놓는다면 양들은 조금씩 그 풀을 먹어 결국 병들어 죽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건강하지 못한 환경들에 둘러싸이게 된다면 그것들을 소비하여 점진적으로 병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플라톤은 수호자들에게 주어질 특정 교육 과정에 국한하지 않고 도시 전체의 문화적 삶에 허용될 교육을 주장한다.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수호자들은 끊임없이 이미지들을 흡수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말해 공적인 학교의 교육 과정과 도시의 문화적 삶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플라톤은 도시의 문화적 삶과 관련해 엄격한 규칙을 제시한다. 그는 신에게 바치는 찬송이나 위대한 인물에 대한 헌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들을 배제하며 회화와 조각에까지 제한을 가하고 있다. 플라톤이 이러한 미학적, 예술적 헌신을 반대하기는 했지만 그는 불건전하고 사치스러운 도시를 순수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키는 교육을 위해서는 그러한 헌신들이 필요하기도 함을 느끼고 있었다. 교육은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정치적 정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전에는 분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수호자들에 대한 교육만이 중요한 것인가에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일 교육으로 수호자들의 영혼이 병들었는지, 건강한지를 결정하게 된다면 사회의 다른 일원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사실 우리는 모든 영혼의 교육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도시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될 교육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도시가 세워진 방식 때문에, 그리고 생산 계급은 정치적인 삶에서 배제되고 있으므로 그들에 대한 대한 교육은 수호자들에 대한 교육만큼 도시의 이익에 중요하지는 않은 것이다. 교육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하지만 전문화된 일에 적합한 기술의 발전에 초점을 두고 있는 생산자들의 교육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 수호자의 교육만큼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소크라테스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주어지는 교육이야말로 도시의 주요한 목표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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