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을 말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1)

by 최용훈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과학, 미술, 건축, 문학. 패션, 심지어 정보통신이나 기술 분야 등 광범위한 학문 영역에서 이루어진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였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루어진 권력 구조의 변화, 비인간화, 소비 자본주의(consumer capitalism)의 대두와 연계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모더니즘(Modernism)과의 연관성을 암시한다. 모더니즘은 20세기 초반에 유행한 미학적 운동을 나타내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적 경향의 계속과, 그것으로부터의 단절을 모두 의미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특성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둘 모두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사이의 완고한 경계를 거부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저급과 고급의 예술, 과거와 미래, 혹은 한 장르와 다른 장르를 의도적으로 혼재시키고 있다. 그렇듯 서로 다르고 부조화한 요소들의 혼합은 모더니즘에서도 사용되었던 자유로운 패러디(parody)를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은 둘 다 ‘혼성모방’(pastiche)의 방식을 사용하였다. 패러디와 혼성모방은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 작품들의 ‘자기 언급성’(self-reflexivity), 다시 말해 독자들에게 작품이 ‘현실’이 아니라 ‘허구’로 구축된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두 경향의 작품들은 또한 파편화되어서 쉽고 직접적으로 견고한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 즉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작품들은 의식적으로 모호하며 다면적 해석을 초래한다. 이러한 작품들에 묘사된 개인이나 주제들은 흔히 삶의 중심적 의미나 목적이 없는 탈 중심적인 것이며, 비인간화되어 개인적 특성을 상실하고 ‘황무지’에 나오는 ‘티레시아스’(Tiresias)처럼 한 시대 혹은 하나의 문명을 대표하게 될 뿐이다.


간단히 말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서구 세계의 불안정성, 방향 상실, 파편화를 대변하고 있다. 20세기에 이르러 서구 세계는 점차적으로 제3세계의 식민지들을 상실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피폐하였으며 마르크시즘과 탈식민주의 시대의 세계적인 인구 이동, 새로운 기술의 발전과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권력 이동 등으로 인해 심각한 불안정성을 겪기 시작하였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모두 주제와 기법 면에서 파편화와 불연속성, 탈 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바로 이 점에서 두 경향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모더니즘은 현대 세계의 파편화와 탈 중심을 비극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삶의 단일성과 중심을 상실한 것에 대해 개탄하여 예술 작품은 현대의 삶에서 상실된 단일성, 통일성, 계속성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듯 엘리엇은 현대 세계가 불모의 황무지이며, 이 세상의 파편화와 불일치가 시의 구조 안에 실행되고 있음을 탄식한다. 그러나 ‘황무지’는 동양 문화에 천착하고 ‘티레시아’를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잃어버린 의미와 유기적인 단일성을 되찾으려 한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파편화와 방향 상실은 더 이상 비극적이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파편화와 탈 중심을 찬양하며, 그것들을 유일하게 가능한 존재의 방식으로 간주하여 그러한 상태로부터 도피하려 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Post-structuralism)가 만나게 된다. 이 둘은 통일성 있는 중심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데리다(Derrida)의 용어를 빌자면 중심은 끊임없이 주변으로 움직이고, 주변은 끊임없이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힘이 자리하는 중심은 전적으로 강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계속 힘을 잃어가고 있으며 힘이 없던 주변은 계속 힘을 얻어간다. 그 결과, 결코 중심은 없으며 항상 여러 개의 중심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중심이 힘을 획득하거나 그 위치를 유지하는 것을 연기하는 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差延, differeance)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파편화를 찬양하는 것은 그 밑에 숨어있는 차연에 대한 믿음 즉, 단일성, 의미, 통일성이 끊임없이 연기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통일성과 단일성을 믿지 않는 것은 모더니즘과의 또 다른 기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모더니즘은 통일성과 단일성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합리성과 질서를 강조한다. 모더니즘의 기본적 가정은 합리성이 질서를 이끌어내고 그로 인해 사회가 더 잘 기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최상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모더니즘은 다른 것---비(非)-백인, 비-남성, 비-이성애, 비-성인, 비-합리 등---을 묘사함에 있어 무질서의 개념을 끊임없이 창조한다. 달리 표현하면, 질서의 우월성을 세우기 위해 모더니즘은 비-백인, 비-남성 등 모든 변경과 주변의 집단들이 무질서에 의해 오염되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와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의 일부는 질서이고 다른 부분은 무질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항대립(bianry opposition)을 비판하며 모든 것이 무질서라고 냉소적으로 주장한다.

데리다-리오타르-보드리야르-제임슨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 Francois Lyotard)


모더니즘의 질서, 안정, 단일성에 대한 믿음을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인 리오타르는 ‘메타 서사’(meta-narratives)라 부른다. 모더니즘은 메타 서사 혹은 대서사(grand narratives)를 통해 이루어지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메타 서사에 대해 불신하고 그것을 해체한다. 메타 사사란 어떤 문화가 그것의 믿음과 실천을 드러내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메타 서사가 사회제도 안에 내재하는 모순, 불안정성, 그리고 차이들을 숨기고, 침묵시키고, 부정하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소서사’(mini-narratives) 즉, 보편성이나 궁극성을 가장하지 않고 작은 실천들과 국부적인 사건들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선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 정치, 문화라는 것들은 권력자들의 대서사일 뿐이며 허위와 불완전한 진실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실체의 가능성을 해체한 후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모더니즘은 언어를 실재와 이성적인 사람들의 행동을 나타내는 합리적이고 투명한 도구로 간주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언어는 생각과 사물을 대변한다. 따라서 ‘기표’(記標, signifier)가 언제나 기의(記意, signified)를 가리킨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단지 표층(surfaces)만이 있을 뿐 심층(depths)은 없다. 기표는 기의를 지니지 않으며, 그것은 나타낼 실체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프랑스의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표층 문화를 ‘모상’(模像, simulacrum)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모상은 미디어나 다른 이념적 기구들에 의해 가장되거나 유인된 가상 혹은 가짜 현실을 나타낸다. 모상은 단지 모방이나 복제가 아니고 가장되거나 가짜의 이미지에 의한 원본의 대체물이다. 현대의 세계는 실재가 가짜 이미지로 대체된 하나의 모상이다. 예를 들어 신문이나 TV를 통해 알게 되는 걸프 전쟁은 실제의 이라크 전쟁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걸프전의 가장된 이미지가 실제의 전쟁보다 더 대중적이고 사실적이어서 보드리야르는 걸프전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는 원본은 없고 단지 복사본만이 있을 뿐이며, 영토는 없고 지도만이, 실재는 없고 모상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이 단지 인공적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늘의 우리가 현실과 가공의 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데릭 제임슨(Frederic Jameson)


우리가 삶의 실체를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는 또한 우리가 소비하는 재화의 실체로부터도 동떨어져 있다. 미디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황을 이끄는 하나의 추진력이라면 다국적 자본주의와 세계화는 또 다른 추진력이라 할 수 있다. 프리데릭 제임슨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제2, 제3의 자본주의와 연결시킨다. 시장 자본주의라 불리는 18-19세기 첫 단계의 자본주의는 증기기관과 같은 초기의 기술적 발전을 목도하였고, 이는 사실적 단계에 해당한다. 20세기 초반은 전기 및 내연기관의 발달과 더불어 독점 자본주의와 모더니즘의 도래를 목격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핵과 전자 기술의 시대, 소비 자본주의 시대에 상응한다. 이 시대는 생산보다는 마케팅과 판매와 소비에 중점이 주어지고 있다. 비인간화되고 세계화된 세상에서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다국적인 마케팅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위에 설명한 리오타르, 보드리야르, 제임슨의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세 가지의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버마스(Habermas)와 푸코(Foucault)의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하버마스는 모더니즘의 명제들인 질서와 진보의 가치를 믿어 근대성(modernity)의 계속성을 주장한 반면 푸코는 후기구조주의의 측면에서 불안정과 무질서, 탈 중심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제시하며 서로 간에 논쟁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포스트모더니즘은 페미니즘이나 탈 식민주의적 시각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을 궁극적으로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구성 자체에 다원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신화와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