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시대-셰익스피어의 삶
1. 연극의 시대-셰익스피어의 시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시대는 셰익스피어의 시대라고도 불린다. 사실 연극사를 살펴보면 연극이 가장 번창하던 시기는 대부분 그 나라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에도 이스킬러스, 유리피데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 등 위대한 극작가가 있던 시대였다. 루이 14세의 프랑스에도 라신(Jean Baptiste Racine)과 몰리에르(Molière) 등의 극작가가 활동하고 있었다. 연극이라는 예술은 시대가 역동적일 때 번성함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영국 역사의 찬란한 시대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영국 사람들의 셰익스피어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사상가였던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인도를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셰익스피어를 잃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셰익스피어는 총 37편의 희곡을 남겼다. 희곡 외에도 시와 소네트를 썼던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을 재현했다. 무한한 감정의 변화들, 뿌리 깊은 인간의 본성, 인간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떨림들, 또 그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과 환희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은 인간 세상의 만화경이다.
2. 셰익스피어의 생애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배우나 극작가처럼 연극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천한 신분의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영국의 대문호일 뿐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유산으로 숭앙되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삶이 역사의 안갯속에 잠겨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간혹 셰익스피어가 실존인물이었는가라는 의문과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셰익스피어의 위명은 별로 훼손되지 않는다. 한 인간이 그렇듯 뛰어난 희곡을 37편이나 쓸 수 있었는가 하는 놀라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몇몇 기록에 의지해 셰익스피어의 삶을 간략하게 재구성한다.
셰익스피어는 1564년 4월 23일 스트라트포드-어펀-에이븐(Stratford-upon-Avo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다. 그곳에는 에이븐 강이 흐르고 아든(Arden)이라는 이름의 숲이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묘사된 자연은 아마도 그의 고향에 대한 기억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태어난 날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4월 23일로 정한 것은 당시 새로 태어난 아이는 3일 후에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 통례였는데 교회의 기록에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의 아이가 4월 26일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어 그로부터 역순으로 3일 전을 생일로 정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는 문법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파산을 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자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셰익스피어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후 벤 존슨이 셰익스피어를 가리켜 ‘라틴어도 못하고, 그리스어는 더욱 못하는’(small Latin, less Greek)이라고 표현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벤 존슨의 표현은 그를 비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빈약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작품을 쓴 것에 대한 찬사의 뜻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동시대 극작가들 특히 옥스퍼드, 캠브리지를 졸업하고 취미로 극작을 하던 소위 ‘대학의 재사들’(University Wits)은 무식하고 시골 출신인 셰익스피어를 시기하여 ‘건방진 까마귀’(upstart crow)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1582년 셰익스피어는 18세의 나이로 쇼터리(Shottery)라는 이웃마을 농부의 딸 앤 해써웨이(Anne Hathaway)와 결혼한다. 그녀는 셰익스피어보다 여덟 살이 연상이었다. 이 성급한 결혼은 그다지 행복한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두 사람은 큰 딸과 아들 그리고 딸 쌍둥이까지 네 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혼 한 지 5년 후인 1587년에 셰익스피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런던의 버비지 극단에 배우로 등재된 1592년까지 그의 행적은 전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셰익스피어 학자들은 이 시기를 ‘잃어버린 시절’(lost time)이라고 부른다. 런던 북부에서 배우를 했다는 설도 있고 어딘가에서 교사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이후의 희곡을 쓸 수 있을 어떤 배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또한 이 시기의 후반인 1590년 무렵에는 그가 런던에서 이미 극작가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둔 그였지만 극작가에 대한 경멸과 의혹에 자괴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이른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 극작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한창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펜을 꺾는다. 그리고 1611년 고향에 가장 큰 저택을 구입하여 낙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유지(gentleman)로 대접을 받으며 집안의 문장도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조용한 몇 년을 보낸 후 셰익스피어는 1616년 52세의 나이로 그의 생일인 4월 23일에 죽음을 맞는다.
그의 사망일이 생일과 같은 4월 23일인 것도 사실은 후대 사람들의 조작일 가능성이 크다. 세례를 받은 날짜에 의해 추정된 생일과는 달리 사망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단서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의 사망일도 4월 23일이어서 유네스코는 두 대문호를 기념해 그 날을 ‘세계 책의 날’로 기념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셰익스피어의 유골은 그의 고향에 있는 성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묻혀있다. 최근 셰익스피어가 과연 생존 인물인가에 대한 관심 속에서 레이저 투과로 셰익스피어의 무덤을 들여다보는 일이 벌어졌다. 영국의 한 대학 연구팀은 셰익스피어의 유골을 살핀 후 엉뚱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의 두개골이 사라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관이 아니라 수의로 쌓인 그의 유골에서 두개골 자리에 무언가 다른 물질이 놓여있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19세기경에 그의 무덤이 도굴되어 두개골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했다. 교회는 즉각적으로 그 주장을 반박했고 앞으로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셰익스피어의 무덤이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의 비문에는 대문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글이 새겨져 있다. 물론 그의 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친구여 제발
이곳에 묻힌 유골을 파내지 마오;
이 돌무더기를 해치지 않는 자는 복이 있으리니,
내 유골을 옮기는 자 저주가 있으리라.
Good friend, for Jesus' sake forbear
To dig the dust enclosed here;
Blest be the man that spares these stones,
And curst be he that moves my bo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