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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 Jun 07. 2022

아버지 손에 들린 사랑

<그림: 박새길>

딸들아.
지금 너희가 먹고 있는 음식들이
나중에 소중한 추억이 될지 몰라.
맛있게 먹는 너희 모습을
행복하게 바라보는
엄마 아빠의 눈빛과 함께 말이야.



8. 아버지 손에 들린 사랑

 

 

미국으로 오기 전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에 가는 날이면 아버님은 장식장 한 칸을 과자며 초콜릿으로 가득 채워 놓고 기다렸다.

아이들은 엄마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신 군것질거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나도 그때만큼은 모른 척 눈 감아주었다.

손주들에게 안 좋은 음식을 먹인다며 어머님이 한 소리했다.

“여보. 애들 입맛 다 버립니다. 과자는 사지 마이소.”

그러면 아버님은 멋쩍게 웃으며 “그래? 난 몰랐지. 그럼 안 사야겠네.” 했다.

하지만 다음 방문에도 과자는 어김없이 꽉 채워져 있었다.

어머님은 “이런 거 아아들한테 해롭다니까. 참.” 하고 화를 냈고 아버님은 다시 변명했다.

“허허. 까묵고 샀지. 다신 안 사요.”


당뇨가 심해 맘껏 못 드시던 아버님은 아이들이 맛나게 먹는 걸 보며 대리 만족했던 것 같다.

먹는 걸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댁에 방문하는 날이면 온종일 음식을 먹고 또 먹었다.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조금 쉬고 있으면 아버님이 양손에 누런 봉투 하나씩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 가져오소.”

아버님 말에 어머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내가 발딱 일어나 쟁반을 들고 오자 아버님은 봉투 안의 것을 쏟아부었다. 군밤이었다.

“이 양반이. 방금 저녁밥에 과일까지 먹었는데 군밤을 뭐 할라꼬!”

“어허. 당신은 먹지 마소. 아아 들 줄라꼬 사온 거니까.”

하지만 그렇게 잔소리하던 어머님은 아버님이 사 온 군밤을 기계 같은 솜씨로 빼내서 당신 입에, 손녀들 입에, 우리 부부의 입에 쉬지 않고 넣어주었다. 잔소리는 잔소리고 맛있는 건 맛있는 거였으니까.

“아가. 내가 돈 아까워서 그러는 거 아이다. 몸에 안 좋아 그러지. 그래도 사온 거니까 얼른 묵자.”

빠른 속도로 없어지는 군밤을 보며 나는 아버님 눈치가 보였다.

“어머님. 아버님 거 좀 남겨드려야죠.” 한 말씀드리면,

“아이다. 너희 아버진 당뇨 때문에 밤에 이런 거 드시면 안 돼.”

어머님은 다신 군것질 사 오지 말라고 다짐받으며 연신 군밤을 깠고, 아버님은 알았다 알았다 하며 마지막 군밤이 사라질 때까지 오물거리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자식 입에 먹을 거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게 그리 좋았을까?  아버님이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을 때가 그때였지 싶다. 두 분 모두 밥이든 군것질이든 그저 우리 입에 넣어주고 싶어 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인가!
“아버지. 그 과자 맛없어요. 그만 사 오세요.”  
도대체 우리 중에 누가 아버지께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술 드시고 오는 날엔 꼭 먹을 걸 사들고 왔다. 늦은 시간인 만큼 주로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사 온 것들이었다. 핫도그, 떡볶이, 호떡……

한창 먹성 좋던 우리에게는 밤참으로 꿀맛 나는 것들이지만 엄마는 못마땅해했다.

“이런 건 몸에 안 좋심더. 뭐할라꼬 길에서 파는 드러분 걸 사 옵니꺼."

“아~들도 잘 먹는데, 마! 먹는 게 드러분 게 어딨어!”  

힘들게 사오고도 욕먹은 아버지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화를 냈다.


얼마 후, 아버지는 메뉴를 바꿨다. 새 메뉴는 야채크래커였다. 첫날 반응은 무척 좋았다. 우리는 야채크래커 세 봉지를 그 자리에서 비웠다. 문제는 그 후였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나 안 드시나 퇴근길에 줄곧 야채크래커만 사 왔다.

“포장 사진 보래이. 야채가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이기 몸에 좋은 과자다.”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기듯 “과자 다 먹었재? 그럴 줄 알고 또 사 왔다.” 하며 너무도 뿌듯해하던 아버지께 그 누구도 과자가 엄청 많이 남았다고 이실직고하지 못했다. 지난번 불같이 화낸 아버지를 보고 이번에는 엄마도 모른 채 했다.  

우리 자매는 과자를 앞에 두고 설전을 벌였다.

“야채크래커가 광에 산처럼 쌓였어. 유통기한 조금 남은 거부터 먹어.”

“친구들 오면 다른 과자 주지 말고 야채크래커부터 줘.”

“그러지 말고 누가 아버지한테 이제 그만 사 오라고 말씀드려.”

“누가? 난 못해. 아버지...... 불쌍해.”

“하긴, 좋은 과자 사 먹인다고 너무 행복해하시더라."

“……”


그러던 어느 날, 친척 아이들이 집에 놀러 오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입이 심심했던 아이들은 과자가 먹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내게 가게에 다녀오라며 돈을 내미는데 엄마가 부엌에서 야채 크래커를 쟁반 가득 들고 왔다.

“이거 무라. 몸에도 좋고 엄청시리 맛있다.”

“아이고 형수님. 과자 공장 해요? 집에 무슨 과자가 이래 많아요.”


나는 아버지 얼굴을 슬쩍 보았다. 당황함과 억지 미소와…… 슬픔, 좌절. 그런 게 마구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아버지한테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언니들도 같은 맘이었을 거다.


어쨌거나 나는 그때부터 야채크래커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아버지가 더 이상 사 오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어디 가서 야채크래커를 봐도 너무 물려서 손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 상점에 갔다가 어릴 적 먹던 야채크래커를 보았다.

“엄마가 어렸을 때 이거 정말 많이 먹었는데.”

그러자 유진이가 물었다.

“야채로 만든 거예요? 몸에 좋겠네. 나 이거 먹고 그냥 야채 안 먹으면 안 돼요?”

“그건 안되고…… 이거 하나 살까?”

나물이나 파가 아닌 과자를 사려는 엄마가 신기했던지 현주가 물었다.

“맛있어요? 엄마 그거 좋아해요?”

난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별로…… 그런데 사고 싶네. 그리고……울 아부지가 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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