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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파족 Feb 01. 2021

Prologue

32살 비혼여성 여정의 시작

이른 새벽 남대문에가서 물건을 떼와 돗자리 하나 펴놓고 악세사리 노점을 했다.

여름에는 해가 길어 8시까지 장사를 할 수 있었지만 가을부터는 해가 짧아져 그마저도 어려웠다.

장사를 접고 밤 10시부터 새벽2시까지는 미싱돌리는 부업을 했다.

한 여름과 한 겨울에는 노점을 할 수 없어 호프집에서 주방일을 했다.

이른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움직이는 바람에 집에오면 잠들어있는 나와 동생의 발을 보면 안심이 된다했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나와 동생을 키웠다.

엄마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 했지만 나는 공부보다는 알바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를 했어야했는데.

공부도 못하고 그저 그런 성적으로 전문대에 진학했다. 내 목표는 그저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2010년 21살. 졸업식도 전에 대학병원 아웃소싱으로 취업을했다. 연봉 1400만원. 점심시간 40분마저도 일을 못끝내면 이용할 수 없었다. 주말 응급실 업무에 지원하면 시간외 수당을 주기때문에 지원해서 매일 일했다. 4대보험 떼고 내게 남는돈은 118만원 남짓이었다. 회식에 가면 높은 직급분들에게 제일 어리다는 이유로 술을 따라야했고 그들이 마시고 난 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면 마셔야했다. 노래방에가면 노래방모니터에 돈을 붙여놓고 여자직원들은 노래부르고 춤춰야했다. 이런 사내분위기에 불만을 갖다보니 나는 혼자가 됐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그에 맞지않는 대우와 급여는 내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버티다보니 매일 출퇴근하는 버스안에서 그리고 유니폼갈아입으러 들어가는 탈의실 앞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 당시만해도 버티지 못하면 실패한 삶이었다. 그렇게 부러졌다.  

감정조절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과호흡을 동반한 공황장애 그리고 과수면. 병원에서는 현실도피의 한 방법으로 잠이 계속 오는 거라고 했다.


모든 것을 그만두고 쉬면서 엄마와 함께 산을 다녔다. 

그렇게 6개월정도를 보내고 다시 여름이 왔다. 


강남에 있는 학원에 취업을 했다. 바이럴마케팅이 한창 많아질 때여서 마케팅 인 줄 알고 들어갔던 회사는 기본급이 전혀 없는 영업직이었다. 그래도 IT학원이라 수평적이고 젊은 분위기에 적응하기 편했다. 첫 시작부터 운이 좋게 병원에서 받았던 월급의 2배를 넘겼다. 아침 9시출근 밤 10시퇴근에 명절이나 크리스마스까지 반납하고 일했고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팀장을 달아 직원채용부터 팀장배출까지 하며 돈도 많이 벌었고 뒤돌아보면 이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이 당시 회사에는 보험영업, 부동산영업, 핸드폰영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많이 일했었고 항상 느꼈던 것이 돈이 흐르는 곳에 있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소비분야 1위가 교육업이었다. 이 당시 금전적으로 여유로워지면서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도 있고 휴일없이 몸을 혹사시킨 덕에 응급실 VIP를 찍을 정도였고 열이 안떨어져서 입원했는데 항생제 알러지반응으로 합병증들이 생겼고 자가면역질환까지 이어져 27일을 입원했고 그 후로 2달을 외래로 다니며 일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나의 20대 최선을 다한 5년이었다.


28살 이런식으로 계속 일할 수는 없었다. 투자에 대한 눈이 뜨였고 집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에 있는 부동산에 다니며 50군데는 더 넘게 집을 봤는데 동네 부동산에 모녀가 돌아다닌 다는 소문이 돌아 처음가는 부동산에가서 자금과 원하는 집을 말하면 나를 알아볼 정도였다. 이때 경매에도 관심을 갖고 입찰을 몇번했지만 내게 기회는 오지 않았다. 결국 경매에 넘어가기 직전의 투 룸을 주변시세보다 2천만원 저렴하게 매수했다. 많이 알아본다했지만 처음이라 서툴렀다. 전세를 놓기위해 벽지도배를 다시 했는데 입주 전에 전세입자가 집을 둘러보다 결로를 발견했다. 벽지를 다 뜯고 결로공사를 하고 다시 벽지를 발라야했다. 이 당시에는 잘못산건 아닌가 너무 섣부르게 결정했나 별의별 생각이 들고 어찌나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던지. 이 집은 현재 두번째 세입자를 구할때 저렴한 전세금으로 일주일도 안돼 환승이 이루어졌다. 현재 시세는 4천만원이 올랐다.


그리고 시작한 일이 부동산 분양업이다.

돈이 도는 곳에 있어야 돈을 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금액이 큰 곳에 있으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시작은 상가분양이었다. 세상에 돈 많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 하지만 내게는 와닿지않았다. 신촌, 홍대, 종로 그 번화가에서도 공실나서 죽는 상가가 얼마나 많은데 .. 상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장점을 어필해 팔아도 막상 공실나면 저 손님은 나를 믿고 분양받았다가 마이나스 난다면 나는 그렇게해서 번 돈은 기쁘지 않을 것 같아 상가분양을 그만뒀다. 


그러다 지식산업센터를 알게 되었고 실입주기업 뿐만아니라 투자자에게도 소액으로 투자할수있고 좋은 현장에 대한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분양을 하며 알게된 지인을 통해 지식산업센터의 메카 가산동에서 가장 큰 회사에 면접을 볼 수 있었고 그렇게 내 인생 2막이 시작했다. 현재 0%대 금리로 사람들이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실입주기업에게는 재산세, 취득세, 법인세감면 등의 혜택이 많이 주어지다보니 마치 기업들의 아파트같은 느낌이었다. 회사 또한 정직하게 영업하고 건강한 곳이라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확신을 가지고 일하다보니 계약은 자연스럽게 따라왔고 자리를 잡을수있게 됐다. 전문대 졸업해서 인맥도 없는 내가 대기업다니는 분들과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님들을 뵙고 그들에게 도움을 드리며 고맙다는 말을 듣고 얘기를 나눌수 있는 것 자체도 너무 재밌었다. 


2021년 32살. 이제 2년째 일을 하다보니 새로운 목표가 생겼는데 비혼여성으로 살아가며 투자 필수의 시대가 도래함에따라 여성 전문 투자컨설팅업체를 만드는 것이다. 남성들한테는 지식산업센터가 익숙하고 편하게 홍보관을 방문하지만 여성들은 지식산업센터자체가 생소한 분들이 많고 홍보관 방문자체를 꺼려하기때문에 우선 널리 알리고 싶다.  


2020년 주식시장의 호황으로 관심없던 사람들도 많이 진입했었는데 부동산 분양은 폐쇄적인 정보가 많아 직접방문하지않으면 알 수 있는게 한정적이기때문에 아무래도 직접다녀야하는데 그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이 우선 목표이다. 


그 시작을 함께하기 위해 브런치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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