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생활 6개월쯤 지나서 영국 시간으로 저녁 11시쯤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머니였다. 평소에 가끔 통화는 했지만 그 시간에 전화가 오는 것이 왠지 나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엄마, 무슨 일 있어요?”
“아들, 집에 뭔가 이상한 게 날아왔는데… 그게 네 아빠가 뭔가 돈을 엄청 많이 빌려서 그런 거 같은데……. 어떻게 하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우리를 괴롭혀야 속이 시원한 건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당황한 어머니께 차분히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그거 있잖아… 종이들 사진 좀 찍어서 좀 보내 줄 수 있어? 만약에 못하면 내가 동생이랑 통화할게요. 걱정 말아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이번에는 도와 드릴 여력이 없는데 금액이 큰 건가? 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다음날 동생의 도움으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독촉장이었다. 빌린 돈에 이자와 원금이 계속 밀려서 압류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빌린 곳이 한 곳이 아니었다. 이름만 봐도 1금융권이 아닌 곳들에서 빌린 이자가 원금의 몇 배를 훌쩍 넘은 것들도 있었다.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형, 이게 뭐야? 이거 뭐야?”
나이 차이는 제법 있지만 군 제대 후 바로 취업해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착한 동생이었다. 안심시켜야 했다.
“걱정하지 마, 별거 아니야, 내가 확인해 볼게. 넌 그냥 신경 쓰지 마.”
웹 사이트에 방을 내놓았다. 조기 복직해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영국에서의 삶은 정리되고 있었다. 가야 한다. 가야만 했다. 이 상황을 두고 여기서 속 편하게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너무 힘들었는데 정리해서 돌아가는 것은 너무도 간단했다. 아쉬움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다시는 영국에 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내 삶에 브레이크를 걸고 앞으로 가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은 바로 아버지였다.
사실, 영국은 군 생활 중에 두 번째로 간 유학 휴직이었다. 처음 유학을 간 곳은 필리핀이었다. 1년 동안 대학 부설 어학원에서 공부를 마쳤지만 원어민에게 영어를 배우고 싶은 갈증에 복직 후 2년 뒤에 두 번째 유학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자비를 털어서 두 번이나 유학을 떠난 군인은 내가 최초이다. 또 휴직한다고 하니 주변 동료들도 나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응원해 주던 따뜻한 관심과 눈빛도 따가운 눈초리로 변해버렸다.
어떤 친한 선배는 직설적으로 조언해 주기도 했다.
“너 나중에 뭐 되려고 그렇게 공부를 하냐? 그것도 군인이 말이야. 야! 부사관은 있잖아, 고졸로 남아 있어야 상대적 박탈감도 덜 느껴서 오래 행복하게 근무할 수 있는 거야. 생각해 봐, 고졸인데 이 정도 돈을 받고 가장 노릇 하면서 생활하네. 그 맛에 버티는 건데 너처럼 이런 짓거리 계속하면 피해 의식만 커져서 못 버티고 결국 나가게 될 거야. 난 네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영국 유학을 결정할 때, 군 생활 10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진급과 좋은 보직에 대한 기회도 눈앞에 있었다. 그동안 노력해 온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주려는 듯 많은 기회가 경쟁하듯 몰려왔다. 그저 손을 뻗어서 잡기만 하면 되는 완벽한 순간이었다. 당시 지휘관 부탁으로 야간에 병사들에게 토익을 가르쳐 주면서 부족한 능력이지만 나눔의 기쁨도 누리고 있었다. 휴직 지원서를 제출하고 얼마 후 연대장님 집무실로 바로 호출당했다.
“휴직을 꼭 해야 하나? 진급하고 내년에 가면 안 되겠어? 혹시 전역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부정할 수 없는 질문에 망설이다가 그렇다고 솔직히 답변 드렸다. 지금이 여러모로 좋은 시기인 것을 알지만 비겁하게 진급하고 휴직하는 것보다 남은 사람 중에 더 열심히 하는 사람이 진급을 하는 게 맞는 거 같다고 말씀을 드렸다.
“만약에 전역을 못 하게 되면 엄청난 기회들을 놓친 거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해.”
눈앞에 놓인 좋은 기회를 놓치면서까지 영국 땅에서 어렵게 머물고 있었던 나였다. 그러나 뚜렷한 성과도 없이 조기 복직을 해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도 서글펐다. 부대 사람들을 무슨 낯으로 봐야 하나 민망하고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국에 도착해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걱정 때문에 버스가 멈춰 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만약에 빚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하지?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영국으로 떠나기 전 어머니는 신축 빌라를 대출받아서 샀다. 돈이 많이 부족했지만 내가 우겨서 전세가 아닌 매매로 결정했다. 어머니가 모은 전 재산과 더불어 내가 가진 돈 전부를 드렸다. 거기에 잔금 치를 때 예상치 못한 일로 급전이 필요해서 사회 초년생이었던 동생의 적금 통장까지 해약하며 어렵게 돈을 맞췄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자신의 전부를 그 집에 내놓았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사 가는 날 행복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깨끗한 새집에 산다는 것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변화이자 기쁨 그 자체였다.
큰 집으로 이사 가면 꼭 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남들에게는 별거 아니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 보기, 식탁에 앉아서 밥 먹기, 침대에서 잠자기’였다. 그동안 살면서 항상 부러웠던 것들이며, 어머니의 반평생 소원이기도 했던 것들이었다.
이사하기 전에 어머니는 한 번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 나라도 부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이사하고 나니 직장 동료도 초대하고, 같이 식사도 하는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다. 서울 변두리에 아파트도 아닌 연립 주택이었지만 모든 성공을 이룬 사람처럼 보였다. 진작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였다.
이런 행복의 순간에도 아버지는 우리를 실망시켰다. 돈 문제를 떠나서 황당했던 일은 이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아버지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꼭 남일 대하듯이 무관심했다. 이사를 마치고 집에 있는데 나에게 전화가 왔다.
“집이 어디냐? 주소 좀 알려줘라.”
한참 후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셨다. 남의 집 구경하듯이 둘러보시더니 던지는 한마디.
“집이 크고 깨끗하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버지가 중심이 되어서 이루어졌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을까? 미움과 증오의 감정은 저 끝으로 치솟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빚 때문에 어머니의 첫 집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힘들게 고생만 한 어머니의 삶이 너무 안쓰러웠다. 만약에 지금 무너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았다. 여러 생각을 하면서 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버스는 집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고 있었다.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큰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서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순간 현실로 돌아온 것이 실감 났다.
어제까지 영국의 아침 공기 속에 동네를 조깅하며 새로운 미래를 꿈꾸곤 했다. 근데 완벽하게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단지 깨어나니 부채가 생겼다는 것이 유일하게 달라진 한 가지였다. 영국 유학은 큰 결심 그 자체였다. 목표를 향해 달려야만 했다. 30대로 접어들었기에 영국에서 무엇인가 확실한 해답을 찾아야만 했다. 전역이 너무도 하고 싶었다.
휴직이 결정되고 출국 전까지 수많은 회사에 인턴을 지원했었다. 단순히 영어 공부만을 위한 유학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면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했다. 학력은 검정고시 졸업, 학점은행제 전문학사, 사이버대학교 학사가 전부였다.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다른 취준생과 비교하니 한없이 부족했다. 누가 나를 뽑아 주기는 할까?
검정고시 학력이 싫어서 대학을 간 건데 대학교도 결국 비정상적인 루트로 졸업한 것처럼 보였다. 만약 내가 기업 인사 담당자라면 절대 뽑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감은 바닥으로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학력 이외에 스펙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아무리 군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필리핀 유학까지 다녀왔었다고 해도 높지 않은 공인 어학 성적이었다. 기초 문법에 동사 개념도 모르던 나였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칭찬했지만, 사회는 정말 냉정해 보였다. 당시 어학 스펙은 오픽 IH, 토익 860점, 한국외대 테솔 전문 대학원에서 받은 테솔 자격증이 전부였다. 엄청난 노력을 한 나름대로 최고의 결과물이기는 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외국계 기업에 이력서를 내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내 잠재력을 글로 표현해야 했다. 그래서 남들은 적지도 않을 군대 수상 내용부터 세부적인 경력까지 빠짐없이 작성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으니 제발 나 좀 인턴으로 채용시켜줘.’
애절했다. 하지만 결과는 냉혹했다. 서류 전형에서 모두 떨어졌다. 혹시나 했지만 애절함으로 호소하는 것은 역시나 아무런 관심도 선택도 받지 못했다. 군대가 싫어서 전역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단지 조금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직업 군인인 부사관도 안정되고 축복받은 직업이 맞다. 하지만 노력을 해도 항상 제자리걸음을 해야만 하는 계급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알면서 시작했지만 목표 지향적인 내 성격 때문에 부사관이라는 직업은 나를 계속 괴롭혔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사회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간절함 때문인지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어쩌면 노력의 보상을 받는 것만 같았다. 도착해서 지냈던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숙식하면서 하우스에서 파트타임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 주셨다. 런던은 특히나 숙박비가 매우 비쌌다. 작은 원룸 하나도 한 달에 최소 70만 원의 월세를 내야만 했다. 그런데 약간의 용돈을 받으면서 그것도 무료로 런던 시내 중심지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은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축복의 기회였다. 잠시 머물고 있을 때 나를 좋게 봐준 사장님께 감사했다. 일을 하면서 계속 이력서를 넣었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전화 한 통이 왔다.
인턴 면접을 보러 오라는 것이었다. 합격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했다. 미리 준비해 온 양복을 입고 면접 장소로 향했다. 마치 성공한 사람처럼 마음이 들떠있었다. 외국에 지사를 둔 한국 회사였다. 런던 중심지에 위치한 회사 건물을 볼 때마다 매일 아침 이곳으로 출근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후회 없이 면접을 보자고 다짐하고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5명의 면접 대상자가 앉아 있었다. 모두 능력자처럼 보였다. 잠시 시간이 생겨 서로를 탐색하는 대화 시간을 가졌다. 한 명은 영국 유명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고 했다. 스펙들이 너무도 화려해서 눈이 부셨다. 갑자기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건 면접을 보나 마나 떨어질 것이 너무도 확실했다. 그리고 두려운 면접이 시작되었다. 앞에 앉은 4명의 심사위원의 다양한 질문들이 쉴 틈 없이 쏟아졌다. 중간에 앉아 있었던 나는 무슨 답변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 할 정도로 혼이 나가 있었다. 그런데 심사위원 한 분이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첫 번째 면접 대상자부터 답변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멘토이며 언제나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그런 행복 가득한 스토리였다. 다음 대상자도 부모님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고민되었다.
‘난 자랑할 게 없는데 어떻게 하지?’
내 차례가 되었다. 그냥 솔직해지자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이런 기회를 가져 본 적도 없고 떨어진다고 해도 전혀 쪽팔릴 것도 없었다. ‘그냥 다 보여주자.’ 솔직한 감정을 최대한 짧게 답변했다.
“부모님은 제게 짐입니다.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가끔 짜증도 납니다. 그런데 너무도 행복한 짐입니다. 그래서 평생 업고 같이 걸어가려고 합니다.”
다른 대상자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미친놈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중간에 앉은 심사위원이 갑자기 내게 질문을 했다.
“왜 서류 전형에 통과했다고 생각하세요?
이 사람들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엉뚱한 내 답변에 많이 어이가 없었구나.’ ‘역시나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사실 자기소개서에 살아온 인생이 너무 순탄하지 않아서 사장님이 꼭 한번 불러 보라고 했어요.”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고난을 위로 받고 있는 것처럼 행복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불합격인 채로 돌아간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렇게 면접은 끝이 났다. 같이 면접을 본 사람들이 내가 채용된 거 같다면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거면 됐다. 진심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밖에도 있다면 언젠가 기회는 있겠구나!’라고 위안받았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이력서를 넣으며 취업을 위해 학원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울렸다. 인턴 최종 합격했으니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꿈은 이뤄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