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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Aug 24. 2021

#17. 엄마가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엄마 머릿속엔 지우개가 있어요.

어머니와 나의 생일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음력 4월이고 내 생일은 양력 5월이다. 올해는 3일 차이가 났다. 동생은 최근 손녀딸 동영상만 바라보는 어머니를 모시고 형과 엄마 생일 축하하기 위해 4시간 운전해서 우리 집에 왔다.


올해로 63세가 되시는 엄마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라고 외치며 한걸음에 달려가는 손녀딸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건강하실 때는 딸이 너무 어려서 이런 재롱도 보지 못했는데, 그래도 치매여도 아직 손녀를 기억해서 다행처럼 여겨졌다.

치매 증상이 나타나면서 오히려 딸과 놀 때 코드가 맞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딸은 할머니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그동안 자신이 그렸던 그림과 장난감에 대해서 브리핑했다. 엄마는 그저 웃으며 딸을 바라보았다. 아직 할머니가 치매인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딸이었다.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아픈걸 인지 못하는 사람이 더 있다. 바로 어머니 본인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없이 슬픔에 잠겼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라도 시간을 보내고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축복일 수도 있다. 아버지는 이런 손녀딸의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세상과 작별을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며,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어떤 음식을 만들어서 어머니와 동생에게 먹일지 고민했다. 제대로 된 집밥을 먹지 못하고 일하는 안타까운 동생 놈과 치매가 심해지면서 편식이 더 심해진 엄마 때문에 메뉴 선정이 싶지 않았다. 대충 음식을 만들면 모두에게 만족감을 주기 힘들었다. 게다가 입맛이 까다로운 딸내미도 있어 이렇게 가족들이 내려오면 장보는 것에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다행히도 고민해서 만든 음식을 잘 먹는 가족들의 모습에 뿌듯하기도 하고,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왔다. 아마도 이런 게 어머니의 마음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끔 스트레스받는 내 모습을 보면서 동생은 그냥 아무거나 먹자고 괜찮다고 건네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우리네 어른들이 했던 그 말의 의미가 이제는 무엇인 알 것만 같다. 특히나 가족이 다 같이 모여 한 식탁에 밥을 먹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가장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쉽지 않다.

그래서 인생은 복잡하면서도 어렵고 절대 만만하지 않을 것일지도 모른다.


갈비찜과 미역국을 만들어 한 상을 차리고 식탁에 같이 앉았다. 엄마는 미역국을 보면서 한마디 던졌다.


"누구 생일이야? 왜? 미역국? 나 미역국 싫은데...."


잠시 침묵이 흐르고 동생이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엄마하고 형 생일이야, 기억 안 나요?"라고 말했다.


21살부터 밖에 나와서 살았던 내게 생일마다 엄마는 전화로 음식은 잘 챙겨 먹냐고 안부를 묻곤 했다. 선물을 주고받는 그런 형편도 안되고, 부대일로 항상 바빠서 생일날 집에 갈 수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해외에 있던, 부대에 있던, 한 번도 잊지 않고 내 생일을 기억해줬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이제는 사랑하는 아들 생일조차 기억에 지워버렸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식탁에 앉아 평범한 가족인척 위장을 하고 식사했다. 마치 아무 일없이 행복한 가족인 마냥 음식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동생은 준비한 케이크를 식탁에 올려뒀다. 딸아이는 케이크를 보고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왜 촛불을 끄는지도 모르는 할머니와 함께 촛불을 켰다.

이런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불편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


'엄마가 아파도 지금처럼만 앞에 같이 앉아 있을 수 있다면, 같이 시간만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사 선생님은 유전으로 발생한 치매이고, 증후가 좋지 않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촉박하니, 최대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라고 우리 형제에게 볼 때마다 말해줬다.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적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세부적으로 물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의 준비를 철저하게 하라는 것은 분명했다.


대략적으로 2년 안에 인지 기능을 포함해서 거동하는 것까지 불편해질 확률이 거의 90프로가 넘는다고 했다. 남은 시간이 2년이라는 말에 눈앞이 깜깜했다. 돌아가시거나 앞으로 볼 수 없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사형선고보다 더 가혹한 말처럼 들렸다.


케이크를 잘라서 디저트를 먹는 것으로 엄마와 나의 생일 축하는 끝이 났다. 아쉬워하는 것은 우리 딸뿐이었다. 군인만 아니라면 당장 엄마 근처에 살면서 매일 얼굴이라도 볼 텐데 참 야속하게도 사는 건 내뜻대로 잘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히 육아휴직 때문에 올해는 많이 올라가서 얼굴을 보고 있다. 하지만 당장 9월에 복직을 하면 또 통제받는 삶에 익숙해지고 가족보다 나라를 더 챙겨야만 하는 것이 부담되었다.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엄마에게 서운한 감정은 없다. 그저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엄마 꽃다운 중년의 나이에 한정된 행복을 누리고 사는 엄마의 모습이 화가 날 뿐이다.

무엇이 이토록 엄마의 치매를 앞당긴 것일까?, 혹시 치료제가 기적적으로 개발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잠겨 잠든 엄마 얼굴을 멀리서 지켜보고 거실에서 잠을 청했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오래오래 건강하게 우리 곁에 있어줘요. 그리고 우리를 잊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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