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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Oct 23. 2021

#22. 다 큰 아들을 때리는 우리 엄마

미안해. 그래도 조금만 참아.

치매가 진행될수록 엄마는 점점 더 과격하게 변해갔다. 특히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면 순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특히 엄마하고 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생 입에서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면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위로 올리고 "우 씨"라고 동생에게 위협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익숙하지 못한 엄마 모습에 처음에 많은 당황을 했다. 인지 등급을 받고 생활하는 엄마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정말 멀쩡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지만, 같이 사는 사람이나, 가족 입장에서 보면 미칠 노릇이었다. 동생도 그런 엄마의 행동에 서운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왠지 본인을 더 미워한다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고, 타지에서 일을 한다는 이유로 엄마에 대한 짐을 동생에게 넘겨준 나는 동생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뿐이었다.


위치 추적기를 핸드폰에 연결하고 외출하려고 하면 엄마는 습관적으로 추적기를 분리해서 방바닥에 던져버렸다.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고 항상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말하는 차분하게 동생에게 '우 씨'라고 말하며 바로 화를 냈다. 신기한 것은 그 옆에서 내가 다시 차근차근 설명하면 큰 아들인 내 말은 좀 더 듣는 것 같았다. 이런 엄마의 태도에 동생의 서운함은 더 커져만 갔다. 


나와 동생은 엄마가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했으면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익숙해진다면 다시 주간보호 센터를 주 3회 보내드리고, 설치한 CCTV와 위치 추적기에 의지해서 불안하지만 우리도 어느 정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희망사항은 언제나 희망에 그쳤다. 


치매라는 무시무시한 병 앞에서 엄마를 제외하고 우리들은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지쳐가는 현실 속에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거나, 도움을 요청한 곳이 없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었다.

친척들도, 엄마의 지인들도 그저 안타까움만 표현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내게 오는 안부전화가 고마웠지만, 나중에는 이런저런 훈수를 듣는 게 불쾌하고 기분이 상했다. 물론 세상에 둘만 남은 우리 형제가 안타까워서 어른 된 입장에서 하는 좋은 말이지만 당사자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실한 도움이긴 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나는 동생에게 심각하게 전역을 언급했다. 1년 정도 더 복무하면 20년이 되기 때문에 당장 나와서 할 일이 정해 진 것은 없지만 작은 연금을 깔고 뭐든 시작하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운이 좋아서 수도권에 직장이라도 구하면 동생과 엄마 근처에 함께 살면서 더 도움을 주고 의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남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한참 젊은 나이에 그만두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해도 마음은 그러고 싶었다. 

 

물리적으로 4시간이라는 거리는 나를 지치게 하고 마음도 멀게 만들었다. 동생도 나에게 무슨 부탁을 하는 것도 조차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에 전역해서 한 곳에 정착할 수 있다면 아내가 반대해도 우리 집에서 같이 모시고 사는 방법도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주는 안정성과 명예는 나를 지탱하는 척추 같은 존재지만 거주지에 대한 선택이 불가능한 특성을 고려하면 좋다고만 할 수 없는 직업이었다. 사실 일이 편한 것도 아니고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기에 여러 가지로 삶이 고단해지면 불리하게 작용했다. 19년이라는 시간을 꼬박 한 직장에 있었으나 부사관인 내 급여는 세금을 포함해서 350만 원이었다. 세금을 제외하면 월 300만 원이었다. 비교할 것은 안 되지만 상대적으로 지휘를 책임지는 장교는 10년 조금 넘게 해도 나보다 100만 원은 넘게 더 받는 듯했다. 

물론 어린 시절 겨우겨우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내게 부사관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기는 했지만 삶이 피곤해지니 낮아지는 자존감과 피해의식은 커져만 갔다. 마치 나와 동생 몸속에 이상한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우리를 망가트리는 것만 같았다. 


물론 군대에도 고충을 가진 간부들을 도와주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하지만 군 전체로 볼 때 내가 가진 고충으로는 심사장 문턱에나 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결국 부양할 수 있는 가족의 여부와 요양 등급이 어떻게 되는지가 중점이었기에 고충 간부가 될 확률은 희박했다.

그리고 예전에 어느 선배가 고충 간부 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 있었다. 


심사를 신청한 간부들의 모두 사연은 다양하고 다 힘들어 보였다고 했다. 고충이 있기 때문에 서류를 준비했을 것이다. 아마 어떤 심정으로 준비했을지 해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선배는 말했다. 심사장에서 그들에 대한 비난의 말들이 오고 갔다고 했다. 누구 상황이 더 나쁜지 심사하는 그 잣대를 어디에 둘지 뻔했다. 결국 눈에 보이는 문서상 근거였을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누가 잘 묻지도 관심도 없지만 가끔 직장에서 엄마 이야기가 나와 짧게 치매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 중 일부는 바로 답변하곤 했다. 우리 엄마도 아프다고 그래서 무릎 수술받는다고.

입장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만을 향해 있는 게 지극히 당연한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서운함도 없었다. 당연히 자신이 사랑하는 부모님이 아픈 것이 최우선이 되는 게 당연했다. 어떤 동정도 관심 가지는 가식적인 말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군인이라는 직업은 특수성이 강하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없는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직장을 다니는 내가 투정 부릴 곳은 없었다. 


그리고 고충을 해결책은 군인으로서 결국 어느 곳에서 살 것인가? 와 연결되어 있기에 고충을 핑계로 좋은 근무지에서 희망하는 것은 아니냐는 오해 아닌 오해를 가지는 것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구걸하면서까지 비참하게 나랏밥을 먹는 것은 불편해서 싫었다. 그저 어머니의 폭력성이 더 심해져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이 더 빨리 올까 걱정이 앞선다. 인지장애로 벌써부터 해야 할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에 대한 구분이 없어졌고, 폭력적 행동의 범위는 작은 아들을 시작으로 점점 확대될 것이 뻔했다.


동생은 내가 정말 원해서 하는 전역이라면 언제든 좋다고 했지만 엄마 때문에 억지로 하는 거라면 너무 급하게 선택하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 그리고 아직은 견딜만하다고 덧붙였다. 내가 보기에는 너덜너덜해져서 쓰러지기 직전처럼 보였는데 동생은 강한 척을 했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리고 어떤 문제든 시간이 해결해준다. 그것이 해결이든 그냥 시간이 흘러서 자포자기한 상태로 머둘 게 되는 것이든 우리는 담담해진다. 그래도 동생을 때리는 엄마나 그냥 웃으면서 넘기는 동생이나 내게는 고통스럽도록 아픈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가 우리를 때리는 건 좋지만 그 보다 엄마의 자고 거친 손바닥이 더 아플까 봐 걱정스럽다.  엄마가 우리를 때려서 지난 세월의 억울함을 풀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아픔도 아픔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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