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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Dec 19. 2021

#23. 평소 연락 없던 친척들에게 연락이 왔다.

#치매 #엄마 #불쌍한인생 #남보다못한친척

이사를 하고 한동안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한 두 아들의 노력은 그 무엇보다 고달프고 간절했다. 한편으로 이런 애씀을 엄마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언제나 걱정만 하고 살던 한 여자가 저렇게 걱정 없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게 야속하면서도 놀랍기만 했다. 엄마의 돌발적인 행동은 전혀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줄다리기를 타듯 불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친척형에게 전화가 왔다.


“작은 엄마한테 무슨 일 있지?”


뭔가 알고 전화한 듯 한 눈치였지만 나는 딱 잘라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자랑도 아니고 도움을 줄 것도 아닌데 이곳저곳 알리고 싶지 않았다. 불필요한 동정 따위는 필요도 없고 싫었다.


“아니요, 왜요? 형”

“너 서운하게 그럴 거냐?, 작은 엄마가 나한테 요즘 새벽에도 계속 전화하고 내가 전화 걸면 받지도 않고, 그래서 몇십 번 했는데 이상한 말을 하는 게 많이 이상하던데?”

      

순간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거짓말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고민 끝에 한숨을 쉬고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형은 우리 엄마 좋아하니까, 말씀드릴게요. 근데 다른 친척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뭔데 뭔데? 작은 엄마 저번에 수술한 위암이 전이됐냐?”     


아니요. 형, 엄마 치매예요. 형을 보지는 못했지만 전화기 건너로 당황한 형의 표정과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적막이 흘렀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석유 배달을 할 때 한동안 근처에 머물면서 같이 일을 했다. 그렇게 어린 형은 엄마와 친해졌다. 엄마를 잘 따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좁은 방구석에서 엄마가 챙겨주는 집밥을 먹곤 했었다. 그런 형이 놀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적막이 끝나고 전화기 너머로 형은 오열을 하면서 울먹거렸다.


“형, 걱정할까 봐, 그리고 말해도 무엇도 달라지는 게 없어서 말 안 했어요.”

“야! 인마! 서운하게 너는 왜 그러냐? 작은 엄마 그러면 지금 어디 계신 거냐?”

“얼마 전에 이사했어요. 지금은 집에 있는데 계속 집에 계시기 힘들 거 같아요.”


형은 다급하게 주소를 묻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고 화가 난 상태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퇴근하면 엄마 폰을 확인하라고 했다.

통화내역에는 형 말대로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수도 없이 발신을 한 흔적이 있었다. 

동생은 엄마에게 왜 형에게 연락했냐고 물었다.


“누구? 아.... 엄마 아들하고 하면 안 되냐고 옛날에 나한테 그랬어. 그래서 그럼 내가 아들이 셋이냐?라고 했는데....”


동생이 묻는 말에 엄마가 한 말이 전화기 넘어 내게 들렸다. 


엄마를 따르던 친척 형이 그리웠던 걸까? 아니면 이사를 하면서 엄마의 진짜 아들들이 미워졌던 것일까? 


동생은 내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하나 도움도 안 되는 그런 존재 아녔냐고 무시하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심란하게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퇴근길에 전화기 울렸다. 번호를 보니 다른 친척이었다. 분명히 어제 형이 다른 분들께 말을 돌린 것이 확실했다. 


“네, 잘 지내셨어요? 어쩐 일이세요?”

“야! 너 작은 고모 무슨 일이냐? 왜? 그런 걸 말을 안 해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하는 거야!”

“아.... 말하지 말라고 하니까.. 전화 왔었어요?”

“뭘 말하지 마! 취해가지고 나한테 대체 뭘 신경 쓰면서 살았냐고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소리치고 날리도 아니었는데.......”


이건 엄마를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들의 체면이 상처받은 것에 대한 분풀이를 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되었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친척들끼리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낸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갑자기 이제 와서 이러는 게 정말 이해가 안 됐다. 

나는 감정을 다스리고 조용히 말했다.


“뭐.... 말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계속 집에 안 좋은 일만 생기니까 그냥 말 안 했어요.”


황당하다는 듯 한 말투로 지금 어디 엄마가 계시는지 물었다. 이사를 했다고 말하니 주소를 물어보고 화를 내며 전화를 끊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였다. 체면이 중요한 것일까? 나라면 적어도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너희들 괜찮냐고, 많이 힘들었을 텐데 고생이 많다고 말해줬을 것이다. 그랬다면 만약에 그렇게 물어봐 줬다면 연락드리지 못한 미안함이라도 느꼈을 것이다. 


얼마 후 찾아온다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말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는 게 그렇다. 눈앞에 일들이 언제나 더 중요하다. 그리고 찾아온 분들도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네고 사라질 뿐이었다.

그저 나는 이만큼 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었다. 


우리를 걱정해주는 고모와 이모도 있었다. 가장 먼저 알게 된 두 분은 언제나 우리 걱정을 먼저 했다. 하지만 그 걱정에 결말은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냥 고생하지 말고, 돈이 들어도 시설로 보내라.."

"아니요. 아직 멀쩡한데요.."

"충분히 잘했으니 너희라도 맘 편히 살아야지."

"엄마를 감히 어디다 두고 와요..."


나는 반항하는 말투로 마지막 문장을 마쳤다. 감히 아직도 나를 보면 웃는 우리 엄마를 어디에 두고 온단 말인가... 엄마가 무슨 물건도 아니고 어디에 둔단 말인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젠가 만신창이가 돼서 결국에는 그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마음의 준비를 안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우리가 살면서 엄마를 힘들게 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 엄마가 주는 고통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충분히 사랑하니까 감당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아픔이자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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