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게 가난을 물려준다면 그것은 죄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의 큰 차이점
2004년 병사로 입대했을 때 적응하느라 많이 힘들었다. 당시에 구타와 가혹행위가 잔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견디니까 버티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 낳아지겠지 하면서 100일 위로휴가만 기다리고 있었고 큰 훈련을 마치고 다음날 휴가를 출발하게 되었다. 행군으로 복귀해서 발바닥은 물집이 가득했고 걷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부대 밖으로 나오자마자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서 당시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가 되지 않았다.
17살부터 사회생활을 했지만 군생활은 나도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당시 그 위로를 여자 친구에게 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집에 도착해서 저녁이 되자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지방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여자 친구는 바빴다는 듯이 말을 했다. 나는 빨리 만나자고 이쪽으로 와달라고 부탁했지만 대답은 퉁명스러웠다. 시험기간이고 할 것도 많다면서 나보고 와달라고 했다. 결국 그 한마디 때문에 크게 싸우기 시작해서 우리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사실 미친 듯이 가고 싶었다. 첫사랑이고 오랜 시간 만나왔기 때문에 그립고 보고 싶었다. 그런데 차비도 없고 데이트 비용은 전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서랍장을 뒤져보았지만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안 간 것이 아니고 못 간 것이다.’
솔직하게 여자 친구에게 말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존심 상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큰 아들 첫 휴가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온종일 일을 하셨다. 군인이라는 이유로 휴가 나와서 부모님께 손 벌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추억이 된 이야기다.
당시는 미친 듯이 비참했다. 만약에 자퇴하고 사회생활해서 어렵게 번 돈을 부모님께 드리지 않고 입대했다면 하는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휴가를 복귀해서 직업군인 되기로 결심했다. 여자 친구 때문이 아니고 밖이 무섭고 두려웠다. 전역해도 밝은 미래가 전혀 없는 터널 속에서 평생 살아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하지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에 대한 차이점을 깨닫지 못하면 큰 후회를 남기게 되어 있다. 그리고 부모가 된 지금 순간 더 많은 부분을 느끼게 된다.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데 안 해 주는 것과 못 해주는 것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능력은 되지만 교육 목적상 또는 더 나은 대안을 위해서 안 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못 해주는 것은 능력이 안 되는 것이다. 철없는 자녀가 조른다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자녀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사실 무능한 부모 자신에게 화를 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상처로 자리 잡힌다.
못 하는 것이 많아지면 자존감도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그래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못 하는 것을 줄여나가면서 안 하는 것을 늘려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안 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10억 순자산이 있는 어떤 사람이 내일 당장 비싼 외자차를 살 수지만 안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누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이상한 심리가 있다.
오기가 생겨서 보여준다는 식으로 무리해서라도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사실 못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더 과소비에 쉽게 노출이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사람의 심리를 잘 이용해서 못 하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준다. 그래서 할부나 카드 사용의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능력을 초과하는 것을 하는 것은 못 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에 따르는 대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나도 아빠로서 하나뿐인 딸에게 모든지 해주고 싶다. 딸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 어떤 게 문제가 되겠는가? 그래서 최근에 그동안 할 수 있었지만 안 했던 것을 하기로 결심했다.
지방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오래된 소형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딸에게 가장 미안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혀 아직 아이도 어리고 불편함도 전혀 없어서 사는 것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에 경기도에 부동산 임장을 하면서 신축 아파트 단지를 몇 개를 둘러보았다. 지상에 차량이 없는 아파트 내부의 풍경은 정말 아이들 천국이었다. 자동차 걱정 없이 또래들과 웃고 떠들면서 어울리는 모습이나, 킥보드나 자전거를 타면서 밝은 타면서 놀고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아파트를 보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지역에 구축 아파트와 빌라 단지를 보면서 차이점 하나를 발견했다.
골목이나 단지 내부에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이 별로 없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살고 있는 구축 아파트에서 딸이 킥보다만 타도 위험하다고 고함을 지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신나게 한 발로 과속도를 내서 즐기려고 하면 뒤에서 엄마, 아빠는 멈추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런 일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밖에 나가자고 해도 최근에는 집에 있는 게 더 좋다고 말한다.
나는 딸이 나가는 것이 싫어지거나 킥보드에 실증을 느꼈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신축 단지의 풍경을 보고 어쩌면 우리 딸이 킥보드를 타면 혼나고 스트레스받는 부모님을 보면서 흥미를 잃거나 타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딸이 초등학교 진학하기 전에 내 명의 신축 아파트에 실거주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참 뛰어놀고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뛰어 놀 시기는 한번 지나면 내 딸 인생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이랑도 상의한 결과 본인도 꼭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세 계약 만료일을 확인하고 내년에 이사계획을 짜고 있다. 하지만 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했다고 하더라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그냥 마음만 아프고 자녀에게 미안할 뿐이다.
나는 수많은 것들을 못하면서 포기하고 살았다. 하지만 내 딸은 많은 것을 부모나 돈 때문에 포기하면서 살게 하고 싶지 않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죄가 아니다.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내 자식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자녀에게 가난을 물려준다면 그것은 내 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