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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Jul 12. 2022

#25. 아들 '밥은?' 그 말이 미치도록 그립다.

#치매 #알츠하이머 #중년 #불치병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에 몸을 태웠다. 막히는 시간을 피하기 위해 저녁 9시에 출발한 고속도로는 한적하고 공허했다. 꼬박 4시간의 운전은 아픈 엄마를 보러 가는 횟수를 급격하게 줄어들게 만들었다. 보기 좋은 핑계이자, 불효자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 장남인 내가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사실이었다. 서울에 사는 동생에 전적으로 엄마를 돌본 지 벌써  2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지방에 살고, 외국인 아내를 두었고, 자녀를 키운다는 거창한 변명을 불만 없이 들어주는 착한 동생 놈을 둔 것이 내게 유일한 복이라면 복이었다.


출발을 한 지 2시간이 지났을 때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야?"

"이제 천안으로 넘어가고 있어.."

"천천히 와... 운전 조심하고.."


누가 동생이고 누가 형인지 고민되는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는 운전대를 계속 잡았다.

귓속에는 윌라 오디오북이 울려 대고 있지만, 머리가 복작해서 인지, 엄마를 오랜만에 보는 것이 두려워서 인지 귀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고막을 스치고 튕겨나가는 것만 같았다.


꾸역꾸역 도착한 엄마 집 아니 지금은 동생만 살고 있는 빌라 앞에 차를 주차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동생은 나를 기다리다 토요일 출근 때문인지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 잠에 빠졌있었다.

나는 조용히 양치를 하고 방 한구석에 몸을 눕혔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이렇게 빨리 증세가 악화될 거라고 예상도 못했는데, 이제는 병원 신세를 지지 않으면 걱정돼서 집에 혼자 둘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다행인 것은 동생이 병원 원무과에 근무하고, 원장 선생님의 배려로 장기 입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덧 시간이 모두 다되어 가고 있었다.

이미 실손 보험은 동일 병명으로 1년 이상 입원 기간을 넘겨 고스란히 비싼 병원비를 내가 감당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 어린 나이부터 어설픈 투자를 해서 아주 심각한 경제적인 위기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경기도 좋지 않고, 투자한 아파트나 주식도 경기 침체 위기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숫자가 감소하고 있는 것에 걱정이라면 걱정이었으나 그럼에도 엄마한테 들어가는 병원비가 모자라서 날리 칠 정도는 아닌 것에 감사했다.

다음 날 아침 마침 친한 지인 결혼식이 근처에 있어서 잠시 들려서 인사를 하고 나는 바로 동생 병원으로 향했다. 잠시 면회를 신청해서 엄마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사드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병원 로비에서 동생에게 전화를 거니, 동생은 엄마를 모시고 내려왔다.


두 달 전보다 훨씬 야윈 모습에 나는 눈동자를 시선을 밖으로 옮겼다. 차마 보기 힘들었다. 엄마는 큰 아들인 내 얼굴을 보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내 손을 잡았다. 그래도 아직까지 우리를 기억해주는 것이, 그리고 우리를 반가워하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최근 음식을 잘 못 먹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이 신경 쓰여서 우리는 죽을 파는 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여전히 두 달 전에 했던 이야기를 나에게 반복했다.


"내가 우리 손녀딸 사진을 원장 선생님에게 보여줬는데... 원장 선생님이 우리 손녀 너무 이쁘다고 말했쪙.."

"정말? 엄마?"

"그리고 원장 선생님이 나한테 사탕을 줬어!"

"우와... 좋았겠다."


녹음된 파일이 무한 반복되듯 엄마는 몇 달 동안 아들 얼굴만 보면 이런 말말 반복했다. 예전처럼 별일 없냐는 안부나? 일은 어떠냐는? 그 무미건조하고 심심한 질문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사실은 그 대화가 미치도록 그립다.


"밥은?"


아마도 이 두 글자가 가장 그립다. 정말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랑과 정성을 모두 함축한 두 단어는 '밥은'일 것이다. 20살 때부터 가난으로 어쩔 수 없이 직업군인이 된 아들이 안쓰러웠던 엄마는 내가 전화를 하면 언제나 첫마디가 '밥은'이었다.  


뭐 할 말이 없으면 그런 말을 할까? 어린 나이에 생각했지만, 그 말속에 의미를 이제는 이해한다. 아마도 부모가 된 내가 딸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도 '밥은?'과 '차 조심하고' 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밥은?이라고 물으면 나는 툴툴거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요즘이 조선시대야! 밥도 못 먹게?"


그럼 엄마는 다음 질문을 했다.


"먼 일 없고?"


밥 잘 먹고, 아무 일 없었으면 하는 객지에 나가서 고생하는 아들에게 표현하는 사랑 덩어리 말들이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나는 이제 아픈 엄마를 오랜만에 만나면 안부를 묻는다.


"엄마, 밥은?"


그럼 엄마는 웃는다. 치매가 심해질수록 엄마는 더 많이 웃는다.

그래서 우리도 웃는다. 엄마는 두 아들이 슬퍼할까 봐 어쩌면 아프지만 우리를 웃게 하기 위해서

웃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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