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 어머니를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정신없는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어느덧 녹초가 된 상태로 퇴근시간이 되었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일과 중에 엄마 생각을 할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밉지만, 현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이렇게 퇴근하고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면 아빠라고 외치며 하나뿐인 딸이 조잘조잘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현관문 앞에서 말해준다. 예전이라면 마냥 행복했을 텐데 딸아이를 보면 엄마가 떠올랐다.
물론 딸을 보면 행복한 감정이 밀려오지만 그만큼 나도 엄마의 자식이었던 그 어린 시절이 머릿속을 빠르게 채웠다. 그렇게 퇴근하고 다시 육아출근을 해서 딸에게 집중하다 보면 어느덧 엄마는 다시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딸아이를 재우고 텅 빈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있으면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오기를 반복했다. 만약 아내가 외국인 아니라 한국사람이었다면 내게 더 위안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했다.
엄마에 대한 어떠한 안부도 지금 내 감정이 어떤지 물어보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은 없다. 나름 오랜 시간이 살면서 서운함조차 끌어 앉고, 내 행복을 버리고 아빠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를 지켜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은 딸이 잠자리에 들면 먹먹한 감정이 나를 조여 온다.
불 꺼진 거실과 모든 전자기계들이 일찍 잠든 집에서 유일하게 밝은 내 방 책상에 앉아 방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을 바라보게 된다. 통통하게 볼 살이 올라온 상태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나는 다시 미안함으로 감정에 기복이 생겼다.
그렇게 엄마를 요양원에 보낸 현실을 적응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 사이에 요양원 원장님은 동생과 나를 포함한 단체 톡방을 개설해 줬다. 그리고 그곳에 몇 장의 엄마 사진을 올려주셨다.
그 사진을 받기 전까지 나는 동생과 많은 통화를 했다.
"형, 엄마 잘 계시겠지? 그냥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좀 기다려보자 톡방 만들어 준다고 했으니까 물어보자고... 혹시 알아? 사진이나 영상을 보내주실지?"
"그냥 걱정이 돼서 그래도 우리 병원에 계실 때는 자주 볼 수 있어서 마음이 이렇지는 않았는데 이게 참 힘드네."
"형은 너희 병원에 입원 계실 때부터 마음이 불편했어. 그래도 네가 곁에 있으니까 조금 마음을 놓았던 거지. 뭐가 되었던 엄마가 병원에 계시니까.. 맨날 다시 집으로 내려갈 때 마지막 엄마 모습을 기억하면 차에서 혼자 울었다."
"형은 그랬겠구나. 내가 지금 마음이 그러네."
통화 속 동생의 목소리는 아직 자책을 하고 있었다.
재가 등급이어서 돌봄 센터로 보냈으면 저녁에 매일 볼 수 있었을 텐데...라는 그 생각을 아직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원장 선생님이 보내 준 엄마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또 봤다. 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담아두고 싶었다.
사랑하는 엄마는 그 속에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동생도 영상을 나처럼 계속 보고 있었던 거 같았다. 그렇게 며 칠 동안 사진과 영상을 보다가 갑자기 이상한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동영상 봤지? 그런데 왜 여기 요양원은 환자복이 없어? 엄마 아직도 입원할 때 그 옷을 입고 있던데..."
"형도 봤어? 나도 그게 이상했어."
"사복 준비물에 추가로 없었잖아. 그렇지?"
"어. 없었어. 입실할 때 입고 있던 옷을 2주가 되어가는데 아직도 입고 계시네..."
"아......."
대화를 하면서 요양원에 대한 불신과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목욕은 시켜주고 있는 건지?'
'속옷은 갈아입었는지?'
'밥은 정말 잘 챙겨주는 건지?'
머릿속에는 불신과 불안으로 가득 차 버렸다.
나는 다음 날 바로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원장 선생님. 요양원 환자복이 없나요?"
"네. 저희는 사복을 입혀드려요."
"그런데 왜? 추가로 사복을 달라고 안 하셨어요?"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제가 집에 있는 거로 갈아입혀드릴게요."
너무 태연하게 사복을 입힌다고 말하는 태도가 당황스러웠다. 만약 내가 물어보지 않았다면 도대체 같은 옷을 어머니는 계속 입고 계셨을지....
그냥 엄마한테 미안할 뿐이었다.
물론 요양원이 많은 사람들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자식만큼 돌봐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이해도 되지만 그래도 자식 마음은 그게 아닌 건 어쩔 수 없다. 문자를 보고 동생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 또한 화가 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동생 앞에서 침착한 척해야 했다.
"퇴근하는 길에 옷을 넉넉하게 챙겨서 전달해 드려. 이게 보니까 뭐가 필요하다는 말조차 잘 안 해줄 거 같은데...."
동생은 한숨을 쉬며 알겠다고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쁘게 생각하면 안 되지만 이런 막막하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감정을 몇 년 전에 똑같이 느낀 적이 있었다.
바로 10개월 된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겠다고 아내가 말할 때가 바로 그랬다. 외국인이고 서로에 대한 이해나 가치관조차 하나도 맞는 게 없고 고집까지 센 그러면서 자기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고 있는 서양 우월주의에 오만함까지 지닌 아내를 이겨낼 힘은 내게 없었다.
몇 번이나 조금 더 우리 손으로 키우자고 설득했으나 이내 설득은 싸움으로 커져갔고... 집에 가만히 있는 걸 싫어하는 타입이라서 나가는 것을 뻔히 알지만 돈으로 결론을 지어가며 내 말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그 후로 우리 부부는 철저하게 돈 관리를 따로 하고 있다. 가끔 남자들이 나를 부러워하지만 속사정은 다르 기는 하다. 언제든 갈라 설 수 있게 굵은 선을 그어두고 사는 거니까.
갑부는 아니어도 아내가 일을 안 해도 충분히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 있었지만 아마도 아내는 돈을 핑계로 자유를 원했던 거 같다. 그렇게 말도 못 하고 표현도 못하는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몇 달 동안 불편했다. 도대체 아이는 누가 키우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만약 아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생겨도 부모가 알 길이 없기에 더 답답했다. 단 한 가지 위안이라면 저녁때 아이의 몸이라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다르다. 엄마는 당연한 요구도 스스로 할 수 없고, 핸드폰으로 연락도 할 수 없고, 면회를 가서 물어봐도 잘 생활하는지에 대한 답변이나 불편함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딸아이는 성장하면서 말도 하게 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지만 엄마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었다. 게다가 더 답답한 점은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