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치매진단을 받고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은 내게 스트레스이자 행복의 기다림이었다. 동생은 서울에서 전라도까지 이런 만남의 시간이 사라질까 봐 아쉬워하며 매 번 힘들게 내려왔었다.
우리 형제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음에 감사해했고 고맙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엄마를 모시고 보내는 명절이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볼 때마다 엄마의 증세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손녀딸과 놀아주고 이야기라도 하던 엄마의 모습은 금방 그 존재를 감췄다.
아직 어린 딸은 할머니가 잘 놀아주지 않고 본인한테 관심이 없다고 오해해서 할머니를 보기 싫다는 말까지 내뱉었다. 그렇게 엄마는 본인의 소중한 자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2년 전에는 바른생활의 국제적인 대표인 외국인 며느리 눈치가 보여도 저녁 9시에 딸과 며느라가 잠들면 몰래 거실에서 셋이서 앉아서 조촐한 배달은 음식을 앞에 두고 영화 한 편을 보곤 했다.
영화라면 누구보다 흥미롭게 보던 엄마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다가 결국 영화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이런 모든 시간들을 경험하고 22년 12월 CDR 3을 진단받은 엄마를 보면서 2022년 추석이 마지막 명절이었으면 어떡하냐고 동생과 염려스럽게 주고받았던 대화가 현실이 된 2023년의 설날은 나와 동생에게 혹한의 빙하처럼 차갑게만 느껴졌다. 우리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영하 10도 이하로 온도는 떨어지고 마음까지 얼어붙게 했다.
동생은 이런 형의 공허함과 쓸쓸함 그리고 죄책감을 달래주기 위해 혼자라도 전라도에 내려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일터에서 동생의 발목을 잡았다. 대체 공휴일 출근 지시가 떨어지면서 동생과 엄마가 없는 온전히 우리 가족끼리 보내는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초등학교 입학을 하는 딸아이 세뱃돈을 주러 왜 삼촌이 내려오지 않냐고 내게 물었다. 그런 아내에게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냥 공기 속에 나쁜 미세먼지처럼 숨을 참고 무시하고 싶었다. 괜히 딸아이 앞에서 기분 좋은 명절 연휴에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모든 감정이 엄마 때문에 소모돼서 그럴 힘도 없었다.
엄마가 요양원에 계신 것은 물론 가슴이 아프지만 더 힘든 것은 엄마와 접속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핸드폰도 사용법도 모두 잊은 엄마의 안부를 알 수 있는 길은 일하시는 분들께 연락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몇 번 영상도 보내주고 잘 있다고 카톡도 왔지만 예상대로 두 달이 넘어가면서 물어보지 않으면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원장 선생님님과 동생이 같이 있는 단톡방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마음에도 없는 글을 남기면서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좋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지만 역시 서운한 답글만 전송되었다.
"제가 명절이라 출근을 안 해서요. 사무실로 연락해 보세요."
서운함은 그리 오래 내 마음에 머물지 않았다.
당연히 연휴이고 원장 선생님도 자기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도 내게 카톡을 보내는 순간에 눈앞에 손주들이 재롱을 부리며 자신을 보러 먼 곳에서 온 자식들과 따뜻한 명절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히려 이런 안부를 묻고 있는 내가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설날 아침날 작년 설날에 억지로 딸아이 한복을 입히고 엄마랑 삼촌한테 앞에서 새배를 하게 했던 그 장면이 아른거렸다. 좁은 거실이 더 좁게 느껴지고 아픈 엄마가 안타깝지만 그래도 다행이고 아직까지 괜찮다고 속으로 생각했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거실이 썰렁했다.
텅 빈 거실을 뒤로하고 습관처럼 설날 아침에 떡국을 만들었다.
작년 같으면 맛있다고 허겁지겁 먹는 동생이 앞에 앉아 있고, 입에 오물오물 넣었다고 바로 뱉어버리는 가슴 찢어지게 하는 엄마가 있을 그 자리는 빈 공간이었다. 대신 아빠의 슬픈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평소 떡국을 먹지도 않던 딸아이가 맛있다고 엄지 척을 하며 한 그릇을 다 비워줬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애써 숨기고 웃음으로 엄지 척하는 딸에게 고맙다고 말을 전했다.
앞으로 명절은 이렇게 우리끼리 보내게 될 텐 데라고 생각하니 참으로 인생이 회색빛처럼 어둡게 느껴졌다.
우울한 마음으로 설날 당일 저녁을 차리고 조촐한 저녁을 먹고 있는데 오랜만에 친한 선배가 부모님을 보러 근처에 내려온다고 초대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라면 엄마랑 동생 때문에 못 간다고 말할터였지만 초저녁이면 불이 꺼질 우리 집을 생각하니 외롭고 괴로워서 두 손 무겁게 가겠다고 답변을 했다.
10년 전에 몇 번 같이 뵀는데 세월은 정말 서둘러서 흘러버렸다.
두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나름 명절이라고 잡히지 않는 택시를 잡아서 찾아간 선배 부모님 집은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시골에 있었다. 마치 문명의 발전이 이곳만 피해서 지나간 것처럼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아들 후배가 찾아온다는 말에 선배의 부모님은 잔뜩 음식을 내주었다. 선배의 두 딸도 어느덧 숙녀가 되어 있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 모두 건강해 보이셨지만 아름답게 연세가 드신 모습으로 그곳에 계셨다.
술자리는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실없는 소리도 하면서 어머님이 챙겨주는 음식을 배가 부르다는 말도 못 하고 먹고 또 먹었다. 억지로 차오로는 음식들처럼 부러움도 차오르고 있었다.
손녀딸들의 재롱을 보면서 웃고 또 웃는 두 분을 보면서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방해가 될까 걱정이 돼서 밝은 척 좋은 이야기만 하면서 어르신들의 농담도 받고 뻔하지만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인생 조언을 듣고 또 듣다 보니 시간은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다.
선배를 포함한 모든 식구들이 자고 가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지만 그럴 수 없다고 웃으면서 몇 번이나 정중히 거절을 했다. 아버님은 시골이라 콜택시가 오지 않을 거라면서 아시는 분에게 연락을 해줬다고 편하게 가라고 직접 연락을 취하셨고, 어머니는 김장 때 담근 김치가 잘 익었다면서 외국인 아내가 싫어해도 혼자 먹으라고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김치통을 내게 주셨다.
선배의 부모님과 형수님 그리고 조카들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선배와 차가운 공기를 벗 삼아 담배를 피우면 택시를 기다렸다. 선배는 내게 괜히 불러서 내 마음이 불편한 건 아니냐고 말을 건넸다.
나는 그냥 선배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선배, 정말 행복하겠다."
선배는 내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알아 온 편한 사이고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줄거리를 브리핑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라는 게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웃음으로 대답을 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쓸쓸한 내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과식을 해서 속이 터질 것처럼 불편했지만 마음은 왠지 모를 위로를 받은 것처럼 가벼웠다.
물론 미치도록 부러웠다. 선배처럼 그렇게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또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한 부모님, 듬직한 동생, 나를 이해해 주는 배우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새끼와 함께 보내는 그런 명절을 상상했었다. 마치 선배가 보낸 올 해의 시끌시끌한 명절을 나도 오랫동안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어린 시절에는 당연한 듯 여기고 생각했었다.
그 평범함이 이토록 어렵다고 그 누구도 알려주기 않았고,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안한 마음과 표현할 수 없는 아픔으로 이번 명절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