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엄마를 집으로 다시 모시고 올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조카 입학식을 본다고 서울에서 동생이 내려왔다. 내려오기 며칠 전부터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형, 엄마 외출이 될까?'
엄마가 아무리 아프고 기억을 잃어가도 손녀 입학식에 사진 한 장이라도 남겨주고 싶다고 말하면 말이다.
나는 너무 애쓰지 말라고 동생을 달랬다. 요양원에 입소 후 병원 진료를 위한 외출도 마음 편하게 허락해 준 적이 없기에 괜히 동생이 상처받을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속마음은 엄마를 잠깐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외면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엄마 면회를 하면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시리고 아팠다. 일상으로 돌아와도 머릿속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힘들었다. 그리고 몸에서 냄새가 나거나 더 악화된 모습을 보면 죄책감이 우리 형제에게 밀려왔다.
동생은 결국 혼자 내려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엄마랑 왔다면 자동차로 내려왔을 것을 이번에는 혼자이니 편하게 기차를 타고 오겠다고 했다. 동생도 치열하게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직장인이기에 얼마나 고단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역으로 마중을 나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회식 일정이 잡혀서 결국 동생은 택시를 타고 혼자 집으로 왔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나를 보며 짧게 동생은 그냥 웃었다.
입학식 전날 휴일이라 딸아이와 함께 학용품을 사러 마트에 갔다. 삼촌을 보고 딸은 어떻게든 장난감을 얻어 내겠다는 일념으로 폭풍 애교를 부렸다. 결국 삼촌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만약 엄마가 건강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도 없이 그냥 건강하셔서 이 자리에 함께 계셨다면 엄마는 너무도 행복해하셨을 텐데.
엄마에게 내 딸은 자랑거리 그 자체였다. 외국인 며느리를 얻고 얻은 첫 손녀였다. 보는 사람마다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서 자랑하기 바빴다. 엄마방 화장대 위에는 딸아이 사진으로 하나 둘 도배가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아도 나는 행복을 느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징그러운 아들 두 놈을 키웠으니 얼마나 딸이 이뻐 보였을까,
사춘기 시절 엄마한테 싸늘하게 했던 모든 말들이 지금 와서 이처럼 죄스럽게 느껴질 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입학식이 시작되고 동생은 걱정하며 학교로 가는 조그마한 조카를 보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정말 시간 빠르다. 우리 조카가 벌써 학교를 가다니, 삼촌은 너무 행복하다."
딸아이는 그 행복하다는 말을 듣고 왜 행복하냐고 자꾸 묻고 또 물었다. 아마도 동생은 정상적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딸아이가 부러웠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짧은 입학식 행사가 끝나고 나는 동생과 함께 딸아이 태권도 학원 등록을 위해 도장을 방문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밝게 운동을 하고 있었다. 관장 선생님과 짧은 대화를 마치고 도장을 나오는데 동생이 말했다.
"형, 나는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면 엄마가 있었는데... 항상 엄마가 있었어. 그때 엄마도 내가 집에 잘 오고 있나 걱정 많이 했을까?"
그 말에 잠시 과거로 시간을 돌려보았다. 핸드폰도 없고, 등굣길도 유난히 멀었던 그때.
엄마는 집에서 부업을 하며 아버지 사업을 돕고 있었다. 집에 꼼짝도 못 하고 전화를 받아야 했던 시기였다. 가끔 학교 친구들이랑 운동장에서 놀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면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이 되니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겨우 이해가 되었다.
고작 8살 딸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쥐어 주는 부모의 마음은 걱정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저녁이 되고 동생과 저녁 식사를 했다. 동생은 내게 단호하고 결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형, 사실 나 아직 포기 못했어."
"뭐를?"
앞뒤도 없이 포기 못했다고 해서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를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오는 거...."
나는 순간 대답을 멈췄다. 동생은 최초 계획대로 요양원 대신 주간보호선터로 엄마를 모시고 출퇴근하는 것을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에 잠도 못 자고 엄마를 따라다니는 동생이 모습을 보고 견디기 힘들고 동생이 지칠 것이 더 걱정돼서 내가 성급하게 결정해서 요양원에 모시게 된 것인데 동생은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엄마 저번에 냄새난다고 했잖아. 그리고 생각해 봐 2년 전에는 엄마 그래도 우리랑 같이 공원도 갔잖아... 그러니까 앞으로 2년 뒤면 엄마가 지금보다..."
동생은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 뒷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엄마의 증상은 정말 대한민국 인터넷 속도보다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 의사 선생님의 말을 우리 형제는 무시했지만 지금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동생은 어차피 결혼도 늦게 할 건데 2년 동안 엄마가 더 심해지기 전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동생에게 오늘 바로 결정하지는 말자고 했다. 어차피 8월에 전세가 만기가 되니 그때 고려해 보자고 설득했다.
그것이 내게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렇게 엄마 없이 딸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