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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Nov 14. 2024

수능시험 때 배 고파서 죽을 뻔했다.

수능이 인생에 전부는 아니다. 지나보면 다 알게 된다.

오전 강의를 하고 있는데 평소와 무엇인가 다른 뭔가가 느껴졌다. 강사실에 오고 가는 작은 대화 속에서 오늘이 바로 수능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무심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딸아이가 수험생이 되려면 아직 오랜 시간이 남아서인지 큰 관심을 두며 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마다 수능 때가 되면 아련 아련 피어오르는 기억이 있다. 


벌써 이십 년이 아주 조금 지난 일이지만 내 인생 첫 번째 수능이자 마지막 수능시험날이 항상 떠올랐다. 점수 때문에 속이 상한 기억도 아니다. 자퇴해서 일하느라 공부는 뒷전에 두며 시간을 보냈다. 그 혼돈의 시간이 돌아보면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응축된 순간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지금은 잘 안다.


모든 행동에 '첫'이라는 단어가 급격하게 붙기 시작했다. 첫 키스, 첫사랑, 첫 여행, 첫 직장, 첫해고, 첫 수능...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사랑과 직장을 배제하면 수능은 짧지만 압도적인 기억 중 하나이다.

큰 아들이 공부를 안 하니 부모님도 자연스럽게 관심의 고리를 놓아버렸고, 먹고사는 것이 바빠서 공부를 신경 써줄 형편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졸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나는 수능시험을 한 번 보고 싶었다.

멀쩡하게 학교 다니는 또래 친구들이 고생고생하면 준비한 수능을 겉으로라도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접수를 했고, 시험을 두 달 앞두고 자기 전에 학습지로 기억되는 수능 문제집을 풀었다가 잠이 들곤 했다. 


점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원래가 암기력도 없고 공부머리도 없는 것을 잘 알기에 그냥 행위에 초첨을 두었다. 


'나도 너희들이랑 같은 날 수능시험을 봤다' 이 정도 생각으로 접수한 것이 딱 맞는 것 같다.


당연히 동네에서 시험을 볼 것으로 알았는데 검정고시라 그런지 시험장소는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그렇다고 아주 먼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랬구나 싶었다. 남들은 초조할지 모르는 시험 전 날 나는 마음 편하게 잠을 잤다. 진심을 다해서 응원할 사람도 주변에 없었다. 첫사랑이었던 그 사람도 그다지 공부에 진심은 아니었기에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그렇게 달콤한 잠을 자고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지금은 아니지만 항상 수능 때 추웠던 옛날이라 잠시 창문을 열고 밖의 온도를 확인했다. 내복까지는 아니라도 적당한 방한을 하고 조금 이르게 집을 나서려고 부산히 준비했다. 엄마는 내게 그래도 시험 잘 보고 오라는 한 마디를 해주셨다. 

나는 지갑에 만 원짜리 한 장을 확인하고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남에 동네로 시험을 치르러 갔다. 정류장에서 내리자 골목 이곳저곳에서 초조한 얼굴에 수험생 친구들이 흘러나왔다. 모두 조그마한 쇼핑백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배정받은 자리를 확인하고 한기가 감도는 교실 책상에 앉아서 나는 1교시부터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시험을 봤다기보다는 찍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렇게 문제를 풀면 시간이 남아서 주변 눈치를 보며 엎드려서 잠을 잤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왔다. 밥을 먹어도 된다는 말에 나는 바로 교실을 빠져나와 지하로 향했다. 


매점이 있거니 싶었다. 짧지만 1년 다녔던 고등학교 지하에는 매점이 있었다. 국수, 햄버거 등 분식류를 팔았다. 나는 종종 친구들이랑 줄을 서서 매점 음식을 먹곤 했다. 남의 학교지만 그래도 학교니까 이런 매점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매점의 문은 닫혀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누구도 수능시험 보는 날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당연히 매점에 가서 밥을 사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점심시간 다른 수험생들의 도시락을 피해서 학교 외곽을 걸었다. 아는 친구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동네도 다르고 설령 아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쪽팔려서 같이 먹자는 말을 절대 못할 나였다. 


안 그래도 서늘한 복도의 한기가 몸 깊숙이 파고들었고, 나는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남은 시간 고통스럽게 시험을 치렀다. 


시험이 끝나고 교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가까운 분식집으로 향했다. 




지금은 수능도 그렇고 모든 것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400점 만점의 수능은 이제 기억 속의 시험이 된 지금. 나는 오늘 그 시절에 나를 떠올렸다. 무모하고 어리숙하면서도 용기는 넘쳤던 그 시절에 나와 잠시 마주했다. 물론 오늘 수능시험을 보고 울거나 속이 상해서 화를 내는 많은 분들이 계실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 시험 하나에 인생에 크게 달라지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직업을 선택할 폭이 달라지고, 만나는 사람의 등급이 달라지고, 노후의 내 모습까지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비록 노력에 배신을 당했어도 너무 큰 실망은 안 했으면 좋겠다.


많이 산 것은 아니지만 명문대를 나왔다고 모두가 행복한 것도, 모두가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아주 조금 살아보니 그것도 그냥 과정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S대를 나와서 평생직장도 없이 이것 저곳 신세를 한탄하는 사람도 보았고, 고등학교 졸업장 하나로 사장이 되어 부자로 사는 사람도 봤다.


나중에 어찌 될지는 나중이 되어야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이번에 망쳤다고 수능을 접는 사람이라면 그냥 거기까지인 것이다. 그게 운명인 것이고 딱 그만큼의 인내심과 시간만을 타고난 사람인 것이다. 결론은 자기 팔자라는 것이다. 

초극성인 부모 때문에 재수의 길로 접어드는 사람도 있겠지만 재수도 자기 의지가 있어야 결실이 난다. 무조건 그러하다. 끝까지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지금이야 추억지만 나도 그 옛날에는 원망을 품고 사는 그런 보잘것없는 평범한 가난한 집안에 장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살다 보니 살아졌고 남들보다 조금 나은 점도 발견하게 되었고,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것들도 명확히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진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쓴 글은 아니다. 사실은 그 시절을 회상하며 바둥바둥 물밑에서 물부림 치는 나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배고팠던 19살을 떠올리며 더 열심히 살아가자고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마도 역대급으로 따뜻한 수능이 아니었나 싶다. 


뜻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모두가 마음만은 따뜻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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