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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Aug 18. 2024

직업군인 그만둔 세 남자의 1박 2일 여행(1)

이런 인연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올여름은 더욱 뜨겁고, 미친 듯이 더웠다. 한적한 오후 오랜 시간 알고 지내온 후배와 통화했다. 우리는 평일 오전, 보통 때라면 열심히 일하고 있을 그 시간에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통화를 했다. 미친 듯이 더운 여름 군대에서 육체적 노동이나 잡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서로 위안하며 동시에 지금 이 시간에도 분명 부사관 중 누군가는 밖에서 땀을 흘리며 힘들게 고생하고 있을 거라고 위로의 말을 하며 1박 2일 전역 축하 여행 계획을 세웠다.


비슷한 시기에 군대에 들어와서 20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군복 속에서 보냈다. 20살 초반 세상 물정 모르고 작은 인정하나에 청춘을 바치던 우리는 결혼도 했고, 가정도 꾸렸으며,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리고 군대에서는 수많은 직책으로 불리며 살아왔다. 내 이름보다 직책이 주는 역할에 나를 맞춰가며 지금과는 사뭇 다른 군대문화 속에서 천천히 늙어갔다.


그 시간을 거쳐 아직 정년이 14년 정도 남았지만 더 이상 군복을 입지 않는 선택을 하고 민간인이 되었다. 물론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우리는 복작하게 밀려오는 감정이 찾아올 때면 서로에게 의지하고 위안하며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했다.


후배는 나보다 몇 달 늦게 전역하는터라 나름 내가 민간인 선배였다. 군대에서도 조금 빠른 선배였는데 전역도 그러했다. 그래서 내가 경험한 감정들을 천천히 설명해 줬다.


갑자기 출근 안 하게 되면 밀려오는 이상한 감정들.

마지막 위병소를 통과할 때 찾아오는 허무함.

그리고 내 인생에서 사라진 20년의 시간.

이제는 연락하면 할 말도 없는 다섯 글자로 저장된 사람들(계급+이름).  


이렇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들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멍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 왜냐면 나도 그랬고 내 선배들도 그러했으니까.


처음 한 달은 나도 모르게 정말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들을 찾고 찾았다. 장난처럼 들리던 군대 꿈도 몇 번이나 꿨다.


'그리워서?' 그건 아니다. 아마도 몸에 밴 상처와 같은 습관 때문이라고 표현하면 적당할 것이다.


누군가를 보면 계급장부터 빠르게 보고, 목례보다 손이 먼저 올라가고, 아무리 억지스러운 지시에도 당연한 듯 결과를 만들어 오고,  어디서 살지, 어디로 갈지 사소한 것까지 통제를 받고 살았다. 무서운 것은 그 통제에 익숙해지면서 보낸 그 시간들이 여전히 우리 몸속에 남아 있어서. 그것들이 빠져나오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군대를 욕하고자, 부사관이라는 계급을 논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감사 일기라서 내가 군대를 나온 것에 감사한다는 그런 표현을 위한 글도 절대 아니다.

여러 후배와 선배들이 조금 빨리 군대를 떠나면 그동안 쌓인 것들을 SNS을 통해 막 던졌다. 떠나기 전에는 없던 용기까지 끄집어내서 모욕하고 공격하고 추잡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많이 목격했다. 그 모습들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솔직히 안쓰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떠날 때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육대전에 올라오는 한탄과 비통한 그런 스토리가 내게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조직이며, 능력보다는 계급으로 사람이 정해지고 불리하면 군인정신을 내세우며 사람을 계급으로 취급해도 공식적으로 용서를 받고 그런 행동을 허가하는 조직이 군대이다. 당연히 약자의 입장에서 서러운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장교, 부사관, 군무원, 병사 입장에서 서로 자기 말을 하기 시작하면 서로에 대한 끝없는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군인이라는 큰 틀속에 있지만 모두 처한 처지가 다르고 목적지와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사실 조금 어릴 때는 나도 군을 떠나면 그런 뒷말을 정말 많이 하고 다닐 줄 알았는데. 막상 나와보니 그 시간조차 아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 사실 말해도 달라질 것은 단 한 가지도 없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그리고 군에 있을 때 나름 바른 표현들을 하고 다녔기에 아쉬울 것도 없었다. 나갈거니까 라는 무책임보다는 상황에는 각가의 명분이 있었다. 물론 어떠한 명분도 신분 앞에서 굴복당하고 용서받지 못하기 나중에는 그마저도 차츰 내려놓았다.

 

이런 미효한 감정을 뒤로해서 그런지 8월 휴가철 그것도 평일에 남자들끼리 가기로 한 1박 2일 여행은 달콤하고 기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는 서울에서 지방까지 내려온 다는 후배를 생각해서 좋은 숙소를 알아봤다. 조금이라도 힐링이 되고 전역을 축하해자는 의미에서 한적하고 좋은 곳이었으면 했다. 다행히도 성수기에 부여 어디쯤 정말 한적하고 좋은 곳을 찾았고 예약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나는 기차역으로 후배를 태우러 향했다. 전날 통화를 하면서 장 봐야 할 것들을 상의했고, 말하던 중 우리보다 2년 빨리 전역해서 이미 자리를 잡고 성공한 선배님 이야기를 했다. 7년 정도 차이나는 대선배님이고, 우리를 진심으로 아끼고 선배다움으로 모범을 보여준 선배였다. 가깝게 사는 나는 종종 찾아뵈었지만, 후배는 부대를 옮기고 3년 동안 얼굴 뵙지 못했다고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글램핑에 가기 전에 들려 오랜만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우리 셋이 모인 것은 3년 전 부대 안에서였다. 그때는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고,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연차가 꽤 차이 났지만 거의 단일 계급인 것 마냥 우리는 모두 같은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당시는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일하면서 마음속으로 지금의 삶을 다들 준비하고 있었다. 막연한 자유가 아닌 타당한 자유를 얻고 싶어 했고, 조금 더 이유가 명확한 삶을 갈구했다. 2년마다 새 주인을 맞이해서 새로운 도구로 세팅되는 삶이 아닌 내 인생의 주인으로 당당히 서고 싶은 강한 욕망은 나이와 계급을 떠나 우리를 더 친하게 만들어줬다.


참 감사한 것이 그 길의 선두에 선배님이 계셨다. 나가자마자 사업은 번창했다. 사업채도 늘렸고, 월 순수입이 기존 월급(430만 원 정도)의 6배를 초과한 지도 한참 되셨다. 정해진 족쇄를 풀고 노동의 삶에서 해방되니 얼굴도 좋아지셨고 점점 군대 물이 빠지더니 이제는 정말 민간인 되셨다.


모두 이렇게 전역 후 완벽하게 잘되는 것은 아니지만 친한 선배가 잘되어 좋았다. 간간히 다른 분들의 소식을 들으면 경비원, 택배, 철거, 샤시보수, 청소업체, 화물운송 등등 이러한 일을 주로 하셨다.


 이런 업종은 우리를 우대한다고 써져 있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몸에 남은 것들은 이런 잔기술이다. 자격증도, 전문교육도 없이 용접부터 간단한 전기시설 설치, 목공, 수리 등 이런 일을 하며 보낸 세월이 더 많다.


요즘은 조금 달라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적어도 오래전에는 그랬다. 혼나면서 배웠고 못하면 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런 일을 마무리하면 마치 훈장처럼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이런 일을 지시하는 분들도 많았다. 이가 없으면 잊몸이 되어야했고, 잊몸에 상처가 나도 어찌해서라도 씹어야했다.  


우리만 인정하는 그런 고생을 하고 나왔기에 계급장 없는 밖에서는 내가 알던 모르던 모든 선후배들이 훨훨 날았으면 하고 바랬다. 다행히도 나랑 친한 선배는 정말 높은 곳으로 비상하고 있었다.


선배님 가게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그 이야기들은 참으로 밝았고 희망에 가득했다. 모두 잘되자고! 응원하면서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격려했다.

3시간 정도 그곳에 머물고 우리는 자리를 이동했다. 바쁜 선배님의 일정을 알지만 글램핑장이 그다지 멀지 않기에 저녁에 가게 문 닫고 넘어오시냐고 여쭈니, 알겠다고 하셔서 기분좋게 주소를 드렸다.


전역한 우리끼리 공감하고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 존재했기에 이 시간의 목마름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었다. 모두 한 집안의 가장이고, 자식들이 있으며 안정적으로 꼬박꼬박 월급 주던 곳을 뒤로하고 나오는 그 선택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알기에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도착한 캠핑장은 한적했다. 평일에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치를 만끽하며 음식을 세팅하고 강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부터 마셨다.


우린 나름 운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나도 그렇고 후배도 그렇고 거의 얼마 후 취직이 되었다. 9월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데 다시 신입이 된다는 설렘도 있고, 생각보다 일자리가 빨리 구해져서 조금 더 놀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아쉬움도 공존했다.


내 경우는 대학 파트 임이고 다소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후배는 정규직이라 부담을 더 느끼는 듯했다. 나는 그런 후배에게 우리가 보낸 20년의 시간을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아도, 몸에 남아 있는 좋은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응원했다.


선배가 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끝도 없이 밀려오는 이야기를 털고 또 털었다.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우리의 청춘을, 다소 불편한 기억을, 안타까운 마음을, 그리고 다가올 정해지지 않은 삶을 계속 이야기했다.


우리는 요즘같이 간부들의 군이탈로 말이 많은 시국에 조금이나마 빨리 떠난 것을 절대 자축하지 않았다. 단지 정해진 것보다 정하고 싶은 욕망이 더 큰 부류의 사람이라고 우리를 정의했다.


그래서 아직 남아 있다고 뒷말도 하지 않았다. 선택은 오로지 각자의 상황과 현실을 바라보는 눈으로 판단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손하다 여겼다.


태어나서 20살이 될 때까지 미성년자라는 틀 안에서 반항도 하고 자아도 형성하며 안전한 울타리에 있었고, 다음 20살부터 40살까지는 군대라는 울타리에서 나름의 임무와 지휘관이 시키는 것들을 하며 살았기에 40살부터 60살까지는 조금 다른 경험을 하며 늙고 싶었을 뿐이었다.


군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인생에서 절반을 더 넘었기에 이 정도면 충분히 애썼다고 말이다.

그리고 감사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앞이 어둡다고 두려워 하지 않고 밝은 촛불을 찾아 나아가겠다고 걸어 나온 용기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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