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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환 Jan 15. 2021

#3. 꽃 중년에 찾아온 암

#이세상유일한내편 #에세이 #좋은글 #부모와자식 #아픈부모도


 신혼집을 꾸미고, 새로운 부대에 적응하느라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임신을 한 가족은 타자에서 외롭게 엄마가 될 준비를 홀로 하고 있었다. 출산 계획을 특별히 세우지 않았는데 결혼식 몇 달 전에 아기가 생겼다. 갑자기 준비 없이 아빠가 된다는 부담도 있었지만 기뻐할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했다. 


“좋겠네, 이제 할머니가 돼서.”


어머니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꿈을 꿨는데 태몽이었던 거 같다고 말했다. 항상 심심하게 집에 혼자 있는 아내에게 아기가 생기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엄마는 내게 걱정 말라고 전화기 넘어 나의 부담감을 느낀 듯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며칠 후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다. 

달력을 보니 건강검진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걱정이 앞서 무슨 일냐고 다급하게 물었지만 동생은 말을 아꼈다. 바로 보고를 하고 휴가를 내서 퇴근과 서울로 올라갔다. 정말 불길한 느낌은 미칠 듯이 나를 두렵게 했다.  무슨 질병인지 말은 안 했지만 큰일이 난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제 겨우 1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 사이 큰 아들 결혼식 그리고 며느리 임신 등 나름 평범하고 행복한 소식들이 내 주변에 생기고 있었는데 다시 누군가 찬물을 부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엄마 집에 도착하니 어두운 표정으로 동생이 거실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안방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언성을 높여가며 동생에게 다그치며 물었다.


  “형, 엄마 위암이랑 대장암 이래....”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거 같았다.

담담하게 말하는 동생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엄마는 미동도 없이 안방에 누워있었다.

암이라는 말을 듣고도 납득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처럼 삶을 엉망으로 살거나 몸 관리를 소홀히 했다면 어쩌면 듣기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차분하게 동생에게 설명해 보라고 말했다. 동생은 이미 의사 선생님에게 설명을 듣고 왔었다. 위암 초기인데 발견된 종양이 악성이어서 전이가 아주 빠르고 위험하고, 대장의 종양은 큰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결국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형제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는 숨소리도 없이 우리 곁에 앉아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길 바랬지만 눈앞에는 진단서가 있었다. 동생은 수술을 서둘러서 해야 한다고 성급하게 재촉했다. 그런데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멍하니 진단서랑 소견서만 바라봤다.


아버지는 간암 말기였다. 물론 늦었지만 더 큰 병원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가슴에 남았다. 아마 병간호를 하면서 본 수많은 고통과 신음소리가 내 머릿속에 영원히 남은 탓이었다. 그래서 엄마만은 신중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말기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 등 병원에서 하라는 모든 것을 했음에도 결국 1년을 조금 넘기고 삶을 마감했다. 병세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 고통을 같이 나눌 용기는 없었지만 지켜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엄마의 경우에는 전이가 빠른 악성 종양이기에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는 종양 부분만 절제를 하는 수술이고, 다른 하나는 위의 3분의 2를 절제해서 나중에 혹시 모를 전이까지  차단하는 방법이었다. 나중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두 번째 수술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위를 거의 다 절제하면 얼마나 불편하고 후유증이 생길지 예측이 불가능했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동생에게 일부 종양만 제거하는 수술이 어떠냐고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때와 다르게 동생은 흥분을 해서 분노를 표출했다.      


  동생은 두 번째 방법을 택했다가 다른 부위로 전이돼서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 거냐면 나를 몰아세웠다. 처음으로 동생이 내게 언성을 높이고 이성을 배제한 행동을 했다. 동생은 위는 늘어나기 때문에 재활하고, 운동 열심히 하면 문제없을 거라고 말했다. 

전이가 돼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아빠를 통해 우리 가족 모두는 지켜보았다. 아버지의 간암은 뇌로 전이되었고, 마지막에는 폐까지 전이되었었다. 정말 지독하고 무서운 질병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몸속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하고 통제해야 성이 풀리는 게 암이 아닌가 싶었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나는 동생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말하는 동안 우리 옆에 말없이 동상처럼 앉아 있는 엄마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두려움도 무서움도 모두 참고 사는 법을 단련한 강한 여자답게 아무런 감정을 잃을 수 없었다. 자식들 앞에서 무너지면 안 된다고 압박을 받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어머니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서 밖으로 나왔다. 한없이 불쌍한 여자였다.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 남편에게 심심한 위로조차 받지 한 채, 한평생을 본인의 이름도 잊은 채 우리들의 엄마로 살아온 여자였다. 

그래서 열심히 살고 돈도 많이 모아서 호강시켜드리고 싶었다.


  항상 미안해하는 어머니에게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훌륭하게 키워줘서 고맙다고 아들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고맙다고 결과로 보여드리고 싶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퇴한 실패한 낙오자라고 해도 언제나 어머니는 내 편이었다. 자퇴를 할 때도 나를 믿어줬고, 직업군인이 되겠다고 할 때도 지지해줬다. 만약 그 믿음이 없었다면 분명히 나는 사람 구실도 못하는 폐인이 되었을 것이었다. 나란 놈은 나약해서 믿어주지 않으면 무너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나약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는 나를 무한으로 믿어줬던 것이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알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것은 내 인생도 함께 암에 걸렸다고 선고하는 것만 같았다. 아빠가 없는 세상도 가끔 허전한데, 엄마까지 보내면 더 이상 두 발로 일어서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평생 주져 앉아서 하늘만 바라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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