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사랑해요.
2025년이 이제 정말 끝자락에 와 있다. 손을 조금만 뻗으면 만져질 정도로 가깝게 마지막을 날짜에 붙어 있다. 내게는 2025년이 평범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극한의 한계였다. 21년 동안 내 살처럼 입 없었던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은 한 해였고, 부족한 것을 알면서 끝까지 부여잡던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부숴버리는 결과물을 만든 한 해였다. 나의 신분 전환은 가족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가져다주었다. 경기도로 이사를 해야 했고,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으며,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고 적응해야 했다. 물론 그 속에 나도 포함된다. 담담한 척하지만 한없이 나약한 겁쟁이인 나는 모든 두려움을 꽁꽁 싸매고 이리저리 딩굴거렸다.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고 전환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다닌 나였고, 그것을 실행으로 이끈 것이 바로 나였음에도 두려웠다. 모든 것이 잘못될까 무서웠고, 그렇게 된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까 봐 더 무서웠다.
마흔의 문턱을 넘은 지 1년이 조금 지났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와 나누는 좁쌀 같은 수다는 나를 언제나 포만감으로 이끌었다. 지금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가 어떤 식으로 나를 위로했으며, 부족한 큰 아들에게 어떤 용기를 주었는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엄마는 어떤 식으로든 나를 응원했다. 작은 쪽지를 남길 때도 있었고, 칭찬에 인식했지만 가끔 대견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충분히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내 의견을 존중해 줬고 일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도 질책하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떤 파도 앞에서도 두 발로 설 수 있도록 나를 단련시켰다. 그 모든 노력 덕분에 사람 노릇하면서 망가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엄마가 건강했다면 나는 2025년 한 해 동안 엄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대놓고 무섭다고 표현하지는 못했겠지만 그 말을 멀리멀리 돌려서 표현했을 것이고, 그것을 엄마는 알아채고 내게 김치찌개를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건강하지 못했다. 2025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병원에 누워계셨다. 365일 매일매일 움직이지 않는 반쪽 몸에 대한 궁금증을 품은 채, 콧줄로 영양분을 섭취하고, 하루에 한 번 물리치료를 받으며 2025년을 보냈다.
2024년 추석 엄마가 쓰러졌을 때 나는 세상을 원망했다. 동생은 자신을 자책했지만 나는 세상을 원망했다. 위암과 치매도 부족해서 뇌출혈까지 마치 약정이라도 한 듯 무엇인가 나쁜 일을 정기적으로 주는 이 불공평을 원망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엄마를 보며, 어쩌면 다가올 2025년이 엄마에게는 쉽지 않은 한 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걱정했다.
살아있는 엄마를 앞에 두고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혐오스러운 죄를 저지른 것처럼 느껴져서 그 생각을 마음 깊은 곳을 밀어 두고 틈틈이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 가서 짧은 면회를 하곤 했다. 엄마는 말이 없었다. 말하는 방법을 잊은 지 몇 년이 흘렀다. 하지만 미소는 남아있었다. 나는 그 짧은 만남에서 매번 눈물을 참아야 했다. 지옥이 있다면 아마도 이것이 지옥일 거라고. 얼마나 지은 죄가 많으면 이런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남아 있어야 하나 하늘을 바라보며 홀로 눈물을 흘렸다. 아빠를 보냈을 때도 그러했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온몸으로 암이 퍼져서 마약성 진통제도 그 통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빠를 요양병원으로 모셔두고 나는 해외로 교육 연수를 떠났다.
그날 아빠는 알고 있었다. 오늘이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큰 아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라는 것을. 그래서 아픈 몸을 부여잡고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요양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는 머뭇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보이고 힘들어 보여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교육이 짧으니 다녀와서 보자고 그동안 잘 참고 있으라고 아빠에게 말했다. 그 옆에는 엄마가 서 있었다. 미국에서 군사교육을 받는 동안 하루도 편하지 못했다. 먼바다를 건너 낯선 땅에 있었지만 내 영혼은 가족들 곁에 항상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한 달이 조금 지나서 새벽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10년도 지난 일이다. 그 후로 엄마가 아프기 시작했고 2025년도 이렇게 끝자락에 와 있다. 나는 무섭다.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지 못할까 봐. 아빠처럼 홀로 쓸쓸하게 보내게 될까 봐 무섭다. 다행히 2025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자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을 동물적 감각으로 느낀다.
엄마한테 산다는 것은 어쩌면 지옥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으면서 누려야 할 당연한 것들을 누군가에 처참하게 빼앗겼다. 그 누군가가 '운명'이라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혹독한 엄마의 운명 속에서도 분명 '행복'을 간직한 순간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엄마는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속에는 우리 두 아들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버렸던 엄마, 그 아픔을 숨기고 성장해야 했던 그 엄마의 아픈 시간들을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엄마는 우리 두 아들에게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줬다. 더 이상 줄 수 없을 만큼 사랑했다. 지금 그 사랑이 느껴진다. 병원 침대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엄마의 미속에서, 엄마의 무표정에서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엄마는 두 아들에게 시간을 주고 있다. 자신이 떠나도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자신을 희생해서 미리 연습을 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아직까지도 말하고 있다. 내가 너희를 너무 사랑한다고 고맙다. 내게 2025년은 너무 행복한 한 해였다고.
PS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에게 나는 어떤 말도 건네지 않으려 한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 앞에서는 위로도, 교훈도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다는 걸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는 불러보지 못한 이름 하나쯤은 남아 있고, 꺼내면 무너질 것 같아 여전히 접어 둔 시간이 하나쯤은 있다.
그것을 꺼내지 않고 살아가는 일 또한 삶의 한 방식일 것이다. 이 글이 당신의 그 시간을 잠시 흔들어 놓았다면 잠깐 멈춰 서도 괜찮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감정도 정리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오늘이 끝나기 전에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그 얼굴을. 그 이름을
말없이 한 번 떠올려 주었으면 한다. 그것으로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것이다.
< 묵묵히 응원을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큰 힘이 되었고, 그 힘은 풀린 제 다리에 작은 힘이 되어 저를 움직이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