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새해가 시작되고 엄마 얼굴도 보고 동생과 시간도 보내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가는 길에 다른 약속도 하나 잡아서 사람들과 새해 덕담을 주고받았다. 지인들과 만남을 끝내고 엄마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월요일 퇴근 시간과 겹친 서울의 올림픽대로는 여전히 구멍하나 없이 촘촘한 퍼즐처럼 꽉 막혀있었다. 그럼에도 새해의 기운 때문인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2025년 한 해 동안 병원에서 잘 버텨준 엄마와 동생을 보러 가는 첫걸음이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강남중심지에서 강서구까지 1시간 40분 정도 걸려 도착해서 동생에게 전화했다. 먼저 엄마 병실로 올라가 있으라는 말에 뻐근한 허리를 스트레칭하고 병실로 향했다. 면회일지에 '아들'이라고 기록을 하고 병실 가서 엄마를 만났다. 언제나처럼 엄마의 코에는 긴 줄이 달려있었고, 엄마는 움직여지는 한쪽 다리를 좌우로 흔들며 무표정한 표정으로 내게 발 인사를 했다. 손으로 콧줄을 뺄까 봐 장갑에 들어가 있는 엄마의 손을 꺼내서 만지며 엄마의 체온을 느끼고 있는데 동생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뭔가 불편한 듯 몸을 움직이는 동생을 보면서 나처럼 허리를 다쳤나 혼자 생각을 했다. 민감한 성격도 비슷했지만 우리는 몸의 약한 부위도 비슷했다. 2025년 연말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허리에 통증이 심해져서 일주일을 고생했었다.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도 힘들고,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동안 체득한 다양한 방법으로 통증을 다스리며 2025년 한 해의 문을 닫았다. 사무직이지만 동생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고, 나보다 허리가 더 좋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얼굴도 조금 이상하고 무엇인가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엄마 병실에서 짧고 시간을 보내고 동생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뭔 일이냐고 짧게 물었다. 그냥 다쳤다는 흔한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동생 입에서는 나온 말은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아니, 어제 화장실에서 혼자 쓰러졌어.. 한 1시간쯤 기억이 없네.. 그때 바닥에 부딪쳐서 얼굴이랑 갈비랑 서리가 맛이 갔어...."
나는 순간 뭔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내 가슴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화'였다.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올 것만 같아서 창문을 열고 대신 담배를 물었다. 동생은 밖에서 저녁 먹는 것은 힘들 거 같다고 시켜 먹자고 내게 태연하게 메뉴를 물어봤고, 나는 말을 자르고 동생에게 물었다.
"병원은?"
돌아오는 답변은 역시나 아직 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뭐 괜찮을 거라는 우리 집안 특유의 말투로. 나는 조금 목소리 톤을 높여서 다시 천천히 말했다.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바로 병원을 갔어야지!"
머릿속은 불길한 생각으로 순간 가득 차버렸고, 아버지를 시작으로 어머니까지 이어진 고통의 시간들이 내게 다가왔다. 잠시라도 평범했으면 좋겠다는 허망한 바람과 함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동생을 재촉했다. 당장이라도 응급실을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고집을 피우는 다 큰 동생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인터넷을 뒤져가며 부모님 때처럼 증상을 잠시동안 찾았다. 쉽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 동생 말대로 그냥 잠시 정신줄을 놓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이놈도 나만큼이나 예민하니까 회사 일에, 엄마에, 결혼 준비에, 직장 상사와의 작고 큰 불화가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견딜 수 있는 총량이 있다면 동생의 총량은 이미 바닥일 것이었다.
어두운 표정을 하고 식탁에 앉아서 내일 하루 휴가를 내라고 말했다. 같이 병원에 가자고.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고. 동생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넘어져 타박상을 입은 몸 어디 한 구석을 만지작 거렸다.
1년 전쯤,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려서 진료를 봤던 병원이 있다며, 규모도 크고 진료 기록도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했다. 아침에 동생을 옆자리에 태우고 출근 대신 병원으로 향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름 익숙한 장면이었다. 병원으로 향하는 그 길. 아픈 사람과 지금은 아프지 않은 사람. 이런 식으로 우리는 참 많이 병원을 다녔다. 지금은 내 옆에 아픈 동생이 앉아 있었다.
도착한 병원은 가득 찬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혼자 편의점에서 어묵을 먹었다. 배고픔을 잠시라도 눌러두고 의사를 만나고 싶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의사와 만날 수 있었다. 의사분은 동생을 기억하는 듯했다. 동생은 쓰러진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고, 선생님은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검사를 한 번에 다 하려면 입원을 추천했고 동생은 알겠다고 했다.
입원할 줄 모르고 나온 터라 집에 잠시 들러서 이것저것 챙겨 나오고, 동생이 일하는 병원에 들러서 휴가를 여장하고 나오겠다고 했다. 자기 몸 아픈 것을 직장에 표현하지 않았을 동생을 보고 나는 궁시렁 거리며 부모님을 가져다 팔았다.
"엄마, 아빠 성격 중 그 아주 나쁜 걸 타고났어, 그거 뭐 죄인도 아니고 쓰러진 건데.. 왜 당당히 말을 못 해.. 아..."
그렇게 말을 던지면서도 왠지 찔렸다. 나도 티를 내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싶었다.
간단히 국밥으로 아점을 먹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동생은 직장에 사정 이야기를 하고 다시 내 차를 찼다. 잠깐 시간이 남아 엄마를 보러 병실로 갔지만 치료 때문에 엄마는 병실에 없었다. 입원할 병원에 도착해서 병실을 배정받고 동생이 환자복으로 환복 한 모습을 보니 머릿속에 어둠이 몰려왔다.
이 틀을 입원하고 퇴원한 동생에게 연락을 하니 아직 검사결과가 모두 나온 것은 아니라고 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뇌 쪽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 정도였다. 아직 젊으니 어떤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믿으면서도 무서움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엄마에게 지금 이런 사실을 말해줘도 이해조차 못하지만, 만약에 아프지 않았다면 치매가 아니었다면 분명 많은 걱정을 하며 밤잠을 설치거나 병실에서 동생과 함께 잤을 것이다. 유난히 약골이었던 동생에게 엄마는 미안해했다. 내가 어릴 때는 엄마가 집에 있어서 밥이라도 잘 챙겨줬는데 동생이 어린 시절, 엄마는 기울어진 집을 지탱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을 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동생은 먹는 것을 부실하게 먹었다. 성장하면 큰 병이 생긴 것은 없지만 체질적으로 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엄마는 더 많이 미안해했다.
이제는 엄마 몫까지 내가 더 많이 챙겨줘야 할 거 같다. 살다 보면 그렇다. 특히 이렇게 이런저런 일이 많으면 더욱 그러하다. 큰 욕심이 사라진다. 명예, 돈, 성공 등 사람들이 가지는 관심에서 점점 멀어진다. 대신 하루하루의 소중함과 살아 있음의 감사함, 그리고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음에 위안을 얻는다. 그렇게 살아온 우리 형제이다. 특별히 이룬 것도 없지만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았고, 살아내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잠시 몸이 지쳤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언젠가는 고요한 작은 초원이 우리 앞에도 펼쳐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