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설날, 그리움은 나를 과거로 안내한다.
명절은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
그저 달력 위에 찍힌 빨간 날이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는 날이었다. 어린 시절, 명절은 설렘의 다른 이름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가던 날의 냄새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생선 비린내와 갓 튀겨낸 전의 기름 냄새, 비닐봉지가 스치는 소리.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새 옷을 골라주었다. 옷을 사고 나면 동네 미용실에 들렀다. 골목 어귀에서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고,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자르며 나는 괜히 어깨를 폈다. 친척집에 가기 전, 우리는 그렇게 작은 의식을 치렀다.
차 안에서는 늘 작은 소란이 있었다. 아빠와 엄마는 사소한 말다툼을 했고, 나와 동생은 뒷좌석에서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창밖으로 논과 산이 흘러갔다. 설날이면 새뱃돈이 기다리고 있었다. 봉투의 두께보다도, 어른들 앞에 서서 허리를 깊이 숙이는 그 순간이 왠지 모르게 어른이 된 듯해 좋았다.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했다. 명절은 그렇게 오고, 또 그렇게 지나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친척들의 왕래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그 거리를 편안히 받아들였다. 명절은 점점 ‘좀 더 쉬는 날’이 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조수석에 앉은 엄마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친척집 몇 군데를 돌며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 엄마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특별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이 묘하게 따뜻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가 마지막 명절들이었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명절은 조용히 사라졌다. 어디를 가지 않아도, 엄마는 늘 우리를 위해 상을 차렸다. 노릇하게 부쳐낸 전과 생선, 김이 오르던 찌개, 달콤한 돼지갈비찜. 밥상 위에는 늘 우리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스물한 살, 직업 군인이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휴가를 나오기 전, 나는 전화를 걸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엄마, 나 가면 밥 해줘.”
그 말 속에 고마움은 없었다.
밥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믿었다. 숨을 쉬는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이제는 그 맛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식당을 바꿔도, 요리를 배워도, 그 맛은 돌아오지 않는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그 부엌의 소리들이 먼저 떠오른다. 기름이 튀는 소리, 도마 위에서 칼이 닿는 둔탁한 리듬, 엄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르던 우리 이름.
가끔 동생과 마주 앉아 그 음식을 이야기한다.
“그때 그 갈비찜 기억나?”
“전은 왜 그렇게 바삭했을까.”
우리는 웃으며 말하지만, 대화 끝에는 늘 잠시 침묵이 흐른다. 엄마는 아직 우리 곁에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어디 가자고 말하지도, 우리를 위해 부엌에 오래 서 있지도 않는다. 명절은 달력에만 남았다.
모든 것이 멈춘 뒤에야, 비로소 나는 안다. 명절은 음식도, 방문도, 새 옷도 아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 돌아가면 따뜻한 밥이 있다는 믿음.
지금도 나는 명절이 되면 그 믿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살아 있는 엄마를, 다시 한 번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