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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흔적

등산용 랜턴

소설 공집을 준비하면서 쓴 엽편 소설/습작

by 그래

그 사람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친구와 같이 술 한잔하고 바람을 쐬기 위해 나간 한강에서 그는 책을 보고 있었다. 어둠을 뚫고 이마에 있는 등산용 렌턴이 인상 깊었다. 잘 생긴 얼굴에 흠이 된 조명이었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서 다음 페이지에 기대감이 있었고,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눈빛은 아쉬움과 함께 탄식이 보였다. 스트레이트 정장의 단추를 풀고 앉아 다리를 꼬고 앉은 위에 책은 하늘색 표지가 불빛에 반짝였다.

“저 사람, 무슨 책을 읽고 있을까?”

“누구?”

술에 취해 붉은 기가 다분한 얼굴이 질서 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시선을 헤집고 있었다.

“저기 가로등 아래 정장 입고, 머리에 등산용 렌턴을 하고 있는 사람.”

“아, 저분.”

“알아?”

“아니, 그냥 몇 번 봤어. 우리 집이 여기서 멀지 않잖아. 저분 여름에는 항상 여기서 저 자세로 책 보셔.”

술은 이미 깼지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내 눈길에 잡힌 그 사람을 차마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가자. 시연아. 2차 가자.”

친구 은지가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린다. 술을 좋아하는 은지는 노는 것도 좋아했다.

“나 오늘은 끝. 잠깐만 내 친구 불러 줄게.”

“누구? 지민이?”

“아니. 남자.”

“진짜?”

나는 은지에게 대학 친구를 불러다 소개해주고 자연스럽게 빠졌다. 그리고 그 남자의 옆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 가지고 있는 작은 책을 펼쳤다. 저녁 시간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가 다가왔다.

“밤에 책 보려면 이건 필수예요. 빌려 줄게요.”

낮은 음성이 조용히 다가와 내게 렌턴을 빌려주었다. 그는 친절하게 그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내 이마에 조명을 씌워주고 불을 켜줬다. 우린 그렇게 앉아 책을 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인 건 얼마 가지 못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나의 책 마지막 페이지가 남았을 때 그의 명함이 책 위에 올려졌다.

“당신은?”

“저는 명함은 없어요. 대신 여기요.”

그에게 내 책을 내밀었다. 그 책은 나의 첫 번째 책이었다. 과연 그가 나의 의도를 파악할까?

“음, 이게 힌트라는 말이죠. 알겠어요.”

얼마 후 출판사에서 연락이 없다. 내 앞으로 선물이 하나 도착했다고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거기엔 등산용 렌턴이 종류대로 있었다. 그리고 와인 잔 두 개.

저녁 나는 그가 중 렌턴 중 무난한 색의 렌턴과 와인 잔 두 개를 가지고 그가 늘 앉아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와인병을 가지고 왔다.

“오늘은 와인과 함께 해요. 책을 보면서 와인도 좋다고요.”

오늘 그의 책은 나의 두 번째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거라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요령도 좋았다.

“센스 있으신데요!”

“호감의 표시입니다.”

우린 와인 잔을 부딪히면서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책을 읽으며 소감을 말했으며, 아쉬운 점도 있다면서 피드백도 해주었다.

“분석을 잘하시네요!”

“직업이니까요.”

“아, 칼럼니스트이셨죠. 역시.”

우리의 공통점은 책이었다. 나는 책을 쓰는 사람이었고, 그는 주로 책에 대한 칼럼을 기재하는 칼럼니스트였다. 책을 좋아했던 우린 매일 저녁 책 한 권을 나눠 읽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은 시집이에요.”

“그래요? 어떤 시인이에요?”

“유명한 분은 아니지만, 이 분 괜찮아요. 볼래요?”

“당연하죠.”

우린 나란히 앉아 책을 펼쳤다.

“어려운 단어는 없네요.”

“맞아요. 그래서 좋아요. 시집이 주는 여운이 좋아요.”

“그런가요? 저는 당신이 주는 여운이 좋아요.”

우리의 밤은 그렇게 깊어졌다.


2024년 서울 공원 밤, 20대 남녀가 책을 보고 있는 모습.png AI(Copilot) 요청글: 2024년 서울 공원 밤, 20대 남녀가 책을 보고 있는 모습

작성일 : 2024년 06월 04일( 첫 공유일)

한참 아이디어가 많던 시기가 있었다. 짧게 기록해 두는 데, 이 글은 그때 쓴 글이다. 긴 글로 이어지기 위한 글보다는 소설 쓰기를 어렵다고 말한 분이 계셔서 예시로 쓴 글로 기억한다. 이런 식으로 엽편소설을 완결시키면서 조금씩 긴 글을 쓰면 된다고 조언했던 것 같다. 소설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서전에 약간의 허구를 가미하면 그게 바로 소설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렵다고 하면 글을 만약 어렵다. 창작은 원래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시도하면서 쓰다 보면 글은 느는 법이다. 모든 것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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