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엽편소설/습작
20살에 떠난 고향이었다. 나도 서울에 가서 잘살아 보겠다고 큰소리치고 떠난 길,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기대했던 대학 생활은 생각 이상으로 재밌었고, 의외로 지역에서 올라온 친구들이 많아 기숙사 생활은 즐거웠다. 4명이 사용하는 기숙사에서 4개의 지역 사투리로 하는 것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고향 입구에 서 있다. 내 나이 이제 40살. 사업 실패로 인해 이혼을 경험하고 갈 곳이 없어 다시 찾은 곳이 고향이었다. 입구에서 이어지는 넓은 논밭은 뜨거운 태양 아래 아무도 일하는 사람이 없다.
푸른 들판처럼 곡식들도 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서울 상경할 때보다 더 없는 짐, 고작 옷 몇 벌이 내 짐 전부다.
“아이고, 진경아! 그래 잘 왔다.”
어머니의 반가운 인사가 왜 그렇게 서럽게 하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나이 40살이 무색하게 남자 오진경은 어린아이가 되었다. 한참 눈물을 쏟고 나니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 생각하자.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자. 알았지?”
어머니의 조언대로 그날은 잠만 잤다.
다음 날 새벽 4시, 문밖이 소란스럽다. 어머니가 밭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소리이다. 평소에는 일어나지도 않는 시간이지만,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나가는 걸음을 따라나섰다.
“더 자지.”
아쉬운 듯 말하시는 어머니의 말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생처음 하는 농사는 실수 연발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역정 한 번 내지 않으시고, 밭일을 알려주셨다. 요령도 없이 힘만 쓰는 나는 결국 사고를 쳤다. 그만 미처 보지 못한 돌을 내리쳐 손가락을 다치고 만 것이다. 어머니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손가락에 둘둘 마시고, 옆 논에 일하시는 박 씨 아저씨를 불렀다.
“이봐, 박 씨, 읍내에 좀 가줘. 울 아들이 손가락을 벴는데, 피가 멈추지 않아.”
“네. 차 가지고 올 테니까 잠시 기다려요.”
박 씨 아저씨의 빠른 대처로 큰 사고 없이 몇 바늘 꿰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손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어머니의 밭일은 도와드리지 못하고 품앗이하러 다녔다. 비닐하우스를 하는 이웃 밭에 오이를 따기도 하고, 방울토마토 수확을 돕거나 손가락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일을 했다.
“진경아, 서울 갔다 오더니 많이 변했다.”
농경 대를 나와 고향에 정착한 친구 은수였다. 은수는 벌써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
“용아,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은수의 아들 용은 이제 6살이었다. 방울토마토 따는 것이 진경보다 한 수 위였다.
“4살 때부터 내 뒤를 잇겠다고 저렇게 열심히 한다. 하하. 기특하지 뭐.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나야, 뭐.”
“보자, 1시간 정도 남았네. 일 마저 하고, 우리 집에서 막걸리나 한잔하자.”
“그래.”
그렇게 1시간 후, 우린 은수의 와이프 장미를 만났다. 어찌 고등학교 동창 부부로 만나니 또 새롭다. 몰랐는데,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 중이었다는 그들은 대학생 재학 중에 부모님 동의하에 결혼했단다. 피임도 안 했는데, 아기가 생기지 않아 장미가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장미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애틋했다.
그러고 보니 전처와 나 사이의 저런 스킨십이 없었던 것 같다. 각자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었던 것 같다. 결혼 생활 1년 동안 부부관계도 몇 번 되지 않았다. 명절도 각자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던 그녀였다. 회사가 망했을 때 그녀는 바로 이혼을 요구했었다. 자기가 어렵게 번 돈을 내 빚을 갚는 데 쓰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1년의 연애와 1년의 결혼 생활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법정을 나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해?”
“아니야. 그냥 나는 전처를 사랑했었나? 하는 생각!”
“전처? 너 이혼했어?”
“응, 한 6개월쯤 됐다.”
“재수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하네.”
“나와 인연이 아니었겠지. 그 얘기는 그만하자. 지나간 얘기다. 너는 여기 생활 어때?”
“나는 좋지 뭐. 우리 아버지 대 있는 게 내 삶의 목표였잖아. 과일 농사라 좀 예민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좋아. 재밌고.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은수는 나의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답을 해야 하는데, 지금 당장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무 말 없이 술을 들이켜니 은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일부터 딴 데 가지 말고, 우리 과수원만 와라. 그 손으로 할 수 있는 일 내가 봐줄게. 붕대는 언제 풀 수 있다고 해? 병원에서?”
“다음 주.”
“알았다.”
나는 은수의 과수원에서 일했다. 두 달 후엔 정식 직원이 되었고, 현재는 1년째 여기에서 근무 중이다. 41살. 고향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진경아! 오늘 한잔할래?”
“안돼. 재수 씨한테 혼나. 어제도 장미가 나한테 전화 왔더라. 무서워. 자꾸 불러 내면 장가보낸다고 하더라.”
은수가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 아니냐?”
“귀찮아. 아직은 혼자가 좋단 말이야.”
“하긴, 가끔 네가 부럽긴 하지.”
그러나 나에게도 인연은 있었다. 과수원에서 알게 된 외국인 아가씨였다. 어눌한 한국말을 하는 그녀는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 사람 같았다. 김치도 잘 만들었고, 어른들에게도 싹싹했다. 30대 후반의 그녀는 첫 번째 결혼에서 가정 폭력으로 힘들게 살았었다. 올해 말에 여권 만료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그녀는 더 이상 한국으로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의 두 번째 인생이 카운트 다운되고 있었다.
작성일 : 2024년 08월 06일 공유
이 소설은 어떤 분의 그림을 보고 쓴 걸로 기억한다. 시골 풍경에 실루엣 같은 그림자로 표현된 것이었는데, 그걸 보고 이 글을 썼다. 기록을 위한 글이 아니기에 기승전결을 모두 갖춘 글이기도 하다. 엽편에 모든 걸 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 재밌는 작업이기도 했다. 퇴고와 수정을 거친 글이긴 하지만, 필자에서 100% 만족하는 글은 없다. 이 글을 쓰면서 역시 나는 웹소설 작가보다는 일반인의 삶을 쓰고 싶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기도 했다. 그리고 점점 웹소설의 분위기를 지워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반가운 글이기도 했다.
*저작권은 작가(아루하)인 저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