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시
'달빛바람'님이라고 브런치 작가님이 있습니다. 작가님의 자작시를 보다가 '할매'를 단어를 보았습니다. 참 오랫동안 불러보지 못한 단어입니다. 제 할머니는 제가 대학생 때 돌아가셨습니다. 구정을 하루 앞둔 날, 평소 아끼고 좋아하셨던 친정엄마(할머니의 막내아들의 처입니다. 큰 며느라기도 있으시면서 유독 막내 며느라기를 예뻐하셨지요. 그래서인지 가시는 마지막날도 막내 며느라기)의 아침상을 받고 가셨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항상 쪽진 머리, 하얀 블라우스와 스님복처럼 생긴 회색바지를 입고 게셨습니다. 행사 때마다 입는 옷은 고은 한복이었어지요. 화려한 장식 하나 없는 흰 한복은 참 단아했습니다. 무엇보다 돌아가시기 1년 전까지 직접 농작을 할 정도로 정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밭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쓰러진 후 풍이 왔고, 동시에 치매도 오셨지요. 친정 엄마만큼 저를 예뻐해 주셨는데, 3번 병문안 가면 어쩌다 한 번은 저를 알아볼 때가 있었죠. 아주 찰나의 안부 인사는 고작 '왔나?' 한 마디였습니다. 그조차 목소리도 없는 묵음이었지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늘 그랬으니까요. 그 입모양은 늘 기억하니까요. 그랬던 할머니가 드디어 집으로 왔을 때 예감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걸 예감하기엔 철없는 대학생이었습니다. 할머니와 다시 명절을 보낸다는 생각으로 조금 들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식사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먼저 할머니께 간 친정엄마가 돌아와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할머니 가셨다."
차마 돌아가셨다는 말을 못 하셨던 친정엄마는 그리 말하셨지요. 임종은 집에서 했지만, 사망선고는 의사가 내려야 모든 절차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바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간 할머니는 의사의 사망선고를 들은 후에야 평안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입관 때 가족과 마지막 이별할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온 가족이 한 줄씩 서서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제 차례가 돌아왔지만, 저는 할 수 없었습니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이 차디찬 뺨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병원에서 수많은 선이 연결된 할머니의 모습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죠. 어릴 적부터 훈련된 기억 상실은 이번에도 발휘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늘 앉아있던 할머니 집과 친정 집 사이에 있는 평상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더운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길을 걷고 있는 저를 향해 할머니는 말하십니다.
"왔나?"
"응."
여전히 철이 없는 손녀의 대답에 벌떡 일어나 땀을 닦아주는 할머니는 이제 없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사진은 친정 식구들 몰래 챙겨 온 제가 태어나기 전인지 후인지 모를 할머니의 사진입니다. 제주도에 놀러 가신 건지 귤밭에 서서 옅은 미소를 짓고 계시는 모습이지요. 이때 할머니는 행복했을까? 의문이 듭니다.
제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삶은 결단코 편안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자식 넷을 혼자 힘으로 품어 키우고, 결혼 후 사는 모습조차 한 동네에서 지켜봤던 할머니는 자식의 민낯을 모두 아셨지요. 제가 아는 일가친척의 치부만 보더라도 절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그랬습니다. 드디어 할머니가 편히 쉬겠구나 안심할 정도였지요. 지금 20년이 넘은 세월, 할머니의 부재를 잊고 지냈습니다.
다시 볼 수 없는 사람,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키워주고, 재워주고, 먹여주신 분이기에 더욱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할매! 잘 있어? 아프지는 않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어. 나중에 내가 가면 나 알아봐 주기다. 할매처럼 늙었다고 놀리기 없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