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4일 수요일
선생님께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그리되 나름의 해석으로 다시 창작해도 되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하셨고, 나는 그걸 이용해 나의 작품을 시작했다.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거다. 원래의 약속과 틀리다. 그러나 도저히 나의 작품이 모작으로 남는 것은 보기 싫다. 기록으로 남기면 되지 않느냐 말하고 싶지만, 기록이 아닌 작품이었으면 좋겠다. 그림을 잘 그려서가 아니라 나의 작품에 대한 배려이고, 의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의 시작은 작품명을 붙이는 것이고, 지금은 그곳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물론 수업시간에 그림 그릴 것을 찾는다. 그건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업시간에 글을 쓰는 것이 시작이다. 그림은 글과 어울리는 배경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음은 나의 해석이다. 어차피 똑같이 그리지 못한다. 비슷하게 그릴 수는 있어도 분명 다르다. 다를 바에는 아예 해석도 달리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생각은 그렇게 결론이 났다. 사진 속에 아이는 쓸쓸하다. 그러나 나의 사진 속 아이는 웃고 있다. 그리고 그 사진을 바라보는 인물이 있다. 이 그림의 끝은 시화로 남을 것이다.
나의 해석으로 바뀔 나의 그림을 보고 싶다면... 디지털 드로잉 시화 모음을 보면 된다. 나의 그림을 그리기 시하자 그림을 그리기 싫었던 지난날이 기억나지 않았다. 매일이 즐겁다.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배울지 기대된다.
오늘 수업에서 배운 것은 바라보는 시선이다. 앉아서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시야는 좁아졌다가 넓어저야 한다. 그러면 그림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바로 앞은 작고, 그 뒤는 크다. 덕분에 스케치를 엎었다. 다시 그리면서 구도를 좀 바꿨다. 원래는 사진처럼 오른쪽 모서리에서 보고 바라보는 것이었는데, 초보자인 나에게는 정면도 쉽지 않을 거였다. 그래서 거기에 맞게 구도를 맞추고, 원래는 큰 벚나무도 줄기만 크게 그렸다. 그리다 보니 어린 남자아이가 앉아 있는 남자만큼 컸다면 벚나무 역시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작은 나무였을 벚나무의 세월만큼 남자의 세월도 그만큼 흘렀다. 돌이켜보면 세월은 눈만 깜빡인 직후 같다.
사진 속의 저 남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