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완결)
발끈했다는 말보다 어리다는 말이 더 화가 났다. 벌컥 소리를 질렀으나 반응도 없는 공주를 보자, 오히려 민망해졌다.
“아, 군대 갔다 오면 어른이야? 우리 아부지는 어린앤가?”
하필 아저씨가 군대를 안 가셨다 하니 더 할 말이 없다.
“아니다, 나 아직 어린애.”
“민석이 말한 대로네. 역시 빠른 인정.”
처음에는 킥킥대며 웃더니, 이내 무릎을 팍팍 치며 웃었다. 도대체 뭐가 웃기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해돋이를 보려 바다를 쳐다봤다. 그러나 이번엔 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왠지 해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배고프다.”
“아침은 가자미 미역국이야. 미역국 좋아해?”
“미역국…. 잘됐네. 겸사겸사.”
“응?”
“내 생일이거든. 오늘.”
공주의 표정이 썩 좋지만은 않다.
“민석이가 그런 말 안 해줬는데….”
“어. 몰라. 민석이는.”
“왜? 너희 친구 된 지 오래됐다며?”
“글치, 친구지. 친구라도 다 알아야 하냐? 게다가 나도 몰랐어. 단지….”
“무슨 말이야? 그게?”
“아냐. 내려가자. 배고프다.”
괜히 말이 길어졌다. 평소였다면 하지 않았을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하고 싶었다. 공주는 나를 따라 내려오면서 계속 물었다. 말뜻이 궁금하다고 물어댔다. 그런데 멀리 민석의 목소리가 들리자, 공주의 입은 조용해졌다. 나를 앞서 걷던 공주가 갑자기 돌아서서 말했다.
“미역국 내가 끓인 거야. 맛있게 먹어. 그래도 생일이니까.”
아저씨의 집은 방과 주방이 전부다. 욕실은 따로 없다고 했다. 공주가 커 가면서 그림에 재능을 보이자 욕실이 있는 집을 새로 지었고, 지금은 공주의 작업장 겸 손님이 찾아오면 방을 내어주기도 하는 다기능 집이 되었다. 거의 잠만 잔다는 아저씨의 본집은 방보다 거실의 역할을 하고 있는 마당의 평상이 더 컸다. 거기에 섬마을 주민 모두와 내가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커다란 상 가운데는 초코파이 탑과 가운데 숫자 초가 있었다. 24, 바로 나의 나이와 같았다. 당황함도 잠시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온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는 이 모든 상황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공주야, 생일 축하한다. 이건 아부지 선물.”
공주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웃으며 생일 축하한다고 말할 뿐이다.
“어? 어. 고마워.”
“공주! 왜? 무슨 일 있어?”
“왜?”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혹시 어디 아파?”
“아니야, 안 아파. 그냥 목이 잠겼나 봐. 아부지 선물 뭐야? 이번에도 캔버스면 안 받아.”
“어? 음, 2년만 더 받아주면 안 돼?”
“안 돼. 이번에도 캔버스면 그냥 오늘 다 줘. 내년엔 다른 거 줘.”
“치. 알았다. 요놈아.”
공주는 꽤 오랜 시간 같은 선물을 받은 건지 상자만 봐도 내용물이 뭔지 알아맞혔다. 아저씨는 멋쩍은 미소로 답했고, 민석은 지난달 나와 함께 갔던 서점에서 산 책에 직접 만든 책갈피를 씌워 선물했다.
“음, 이번엔 소설책이지?”
“응, 소설책. 이번엔 내가 안 골랐어. 재가 골라 준 거야.”
“진짜? 다행이네.”
책을 펼쳐보던 공주가 나를 보고 씩 웃었다.
“이거 나 꼭 읽고 싶었던 거야. 골라줘서 고마워.”
어제와 다른 말투와 억양, 아저씨도 민석도 공주를 새롭게 바라보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아침에 바뀐 목소리가 어쩌면 나의 생일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나도 고마워.”
공주가 한쪽 눈을 식구들 몰래 깜빡였다. 나는 헛기침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서 먹어. 이거 공주가 만든 거야! 생일 만이라도 맛있는 거 먹고 싶다고 매년 자기 생일도 지가 끓여.”
“아부지는 굽기만 해. 이 생선은 아부지가 구웠어. 저기 저 연탄불로.”
“네. 맛있어요. 불맛이 제대로입니다.”
“그래? 다행이네.”
아저씨가 연탄불에 그을린 자국을 손수 털어내고, 말끔한 부분만 골라서 내 옆에 놓인 앞접시에 담아주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사랑이었다. 굳이 밀지 않아도 되는 밥그릇까지 내 앞으로 좀 더 밀고, 국도 마찬가지, 손수 숟가락을 들어서 내 손에 쥐여주었다.
“맛있게 먹어. 김치 이거 2년 묵은 거야. 그것도 땅속에서 말이야. 진짜 시원하고 맛있어. 요 안에 생선 들었는데, 아주 잘 삭아져서 진짜 맛있거든. 보자. 오, 여기 있네. 자, 밥 위에 젓갈처럼 얹혀 먹으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몰라. 어때?”
문득 민석을 처음 만난 날이 생각났다. 그때 민석도 이랬다. 목감기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알바도 힘들게 나갔다. 전날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닦은 불판을 여러 개 들지도 못하고, 겨우 2개씩 옮기고 있었다. 그때 2m의 거구가 나타나 밀린 불판을 순식간에 처리하고, 몽땅 들어 홀로 옮겨주었다. 그 거구가 민석이었다.
“야, 밥 못 먹었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어,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기에 소리는 작고, 갈라져 제대로 발음도 되지 않았다. 민석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가게 밖으로 아예 나가버렸다.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진 행동이라 민석의 행동이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잠시 후, 오후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민석이 나를 불렀다. 민석을 따라 홀 안쪽 개인룸으로 들어갔다.
“…?”
영문을 모르는 내 앞으로 민석은 멀건 흰 죽을 내밀었다. 여전히 멀뚱하게 민석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죽그릇을 자기 쪽으로 당기더니 죽을 휘적이며 식혔다. 다른 숟가락으로 한 입을 먹어보더니 다시 나에게 내밀며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내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먹여주는 건 못 해. 그러니까 네가 먹어.”
“응?”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그러면 지금 바로 밥 먹는 거 힘들어. 그러니까 죽 먹어. 내가 유아식처럼 곱게 갈아달라고 했어. 그냥 마시듯이 천천히 먹어. 그리고 약 사면서 물어봤는데, 갑자기 음식 들어가면 위가 놀라서 탈 난다고 했어. 그러니까 죽만 먹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조금씩 늘리고.”
“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잠긴 목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고맙다고? 알아들었어. 참, 먹고, 집 가서 자. 사장님한테 내가 말했어. 내일까지 쉬다 와. 네 몫은 내가 해줄게. 월급에서 안 빠질 거야. 네 사정이나 내 사정이나 거기서 거기잖아. 어서 먹고 가. 난 이제 일하러 갈게.”
민석이 나갈 때까지 한 숟갈도 뜨지 못하고, 문을 닫고 나가는 모습만 보았다. 문이 닫힌 후, 배고픔은 순식간에 몰려왔다. 허겁지겁 한 그릇을 비우고, 민석이 사다 준 약 봉투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홀로 들어온 사장님은 나를 보고 미련한 놈이라며 시계를 쳐다봤다.
“네 집이 여기서 10분이라고 했나? 보자. 시간이…. 가자. 데려다줄게. 걸어서 10분이면, 차 타면 2분도 안 걸리겠네. 어서.”
사장님의 배려 덕에 평안하게 집에 왔다. 주인이 없던 차가운 바닥이 그제야 돌아와 보일러를 켰어야 겨우 온기를 찾아갔다. 동시에 조금 전 상황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아팠던 탓인지 이날 난 정말 많이 울었었다. 그리고 한 푼도 빠지지 않은 월급을 받았을 때 다시 울고 말았다.
민석의 따뜻함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온 거였다. 두 사람의 따뜻함과 공주의 선물이 문제였다. 나는 또 밥상머리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비록 친구의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이렇다는 것을 깨달은 탓도 있었다.
“왜 그래?”
갑자기 우는 나를 이해 못 한 민석은 이마에 손부터 올렸다.
“안 아파.”
“그러면 왜 울어?”
“그냥 나도 가족이 생긴 것 같아서.”
“전에 내가 가족 해 준다고 했잖아. 갑자기 느끼고 그래.”
뜻밖에 행동은 나만 있지 않았다.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일어나서 나를 안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은 민석은 물론 아저씨의 표정도 이상하게 만들었다.
“어, 저기, 이게 그러니까.”
“나도 해줄게. 네 가족.”
공주의 한마디가 아저씨의 표정은 험악하게 민석의 표정은 오묘하게 만들었다.
“어, 고마워.”
비록 두 사람의 미움을 받을 것 같았지만, 공주의 품이 좋았다. 다른 어떤 품보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일주일 뒤 기숙사로 돌아왔다. 학교 식당에서 민석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을 때 공주의 안부 문자가 도착했다. 잘 도착했냐는 간단한 문자 뒤에 붙은 하트가 설렜다.
“민석아!”
“응.”
“지금 여름이지?”
“응, 여름이지.”
“근데 봄 같다.”
“뭔 그지 같은 말이지?”
“아니, 그냥 따뜻하네.”
“음…. 뭐지? 이 쎄한 느낌.”
“밥 먹자. 아, 봄같은 여름도 좋네.”
다음 단편은 또 언제 연재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쓰면 그때도 다시 토요일마다 연재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